용이 살고 있었다는 용소마을과 바둑대가 조정통
용이 살고 있었다는 용소마을과 바둑대가 조정통
  • 강진신문
  • 승인 2020.03.2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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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등 작가와 함께하는 우리동네 옛 이야기 5]
바둑의 신 조정통(Ⅰ)

국사봉에서 시작된 물은 아래로 흐르면서 몸집을 아주 크게 불리지. 그렇게 생겨난 물줄기가 바로 탐진강이야. 탐진강은 강진만으로 이어져 수수만년 대양을 이뤄냈고 말이야.

탐진강 주변 곳곳에는 깊은 소(연못)들이 있어. 사람들은 그곳을 용이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에 '용소'라고 부른단다. 가뭄이 들어 농사를 짓기 어려울 때마다 사람들은 용소에 사는 용에게 기우제를 지내며 비가 내리기를 빌고 또 빌곤 하였지.

그러고 보면 용은 사람들에게 신이나 마찬가지야. 고려 공민왕 때 일이야. 느닷없이 문하시중이란 최고로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 강진으로 내려온다고 야단법석이었어. 그것도 군동면의 풍동마을에 있는 안지 그러니까 용소 앞에 정자를 짓겠다는 거야.

쟁기질을 하다 잠시 숨을 돌리는 농부가 물었어.
"철야(지금의 나주남평)군을 지낸 조정통 나리라고 들어봤는가?"
"듣다마다! 오룡을 낳으신 분이잖어."

논두렁에 앉아 곰방대에 담뱃불을 붙이고 있던 농부가 대답했단다. 조정통의 다섯 아들이 죄다 '용'자 돌림의 이름인데, 높은 벼슬을 지낸데다 한결같이 효자들이어서 사람들이 조정통이 사는 마을을 '오룡동'이라고 부른다는 거였어.

쟁기질하는 농부가 다시 물었어.
"조정통 나리가 바둑의 신이라는 건 알고 있남?"
"바둑? 바둑……그게 뭔가?"
"예끼! 무식한 사람 같으니. 아, 거……바둑도 몰라? 바둑판에 하얀 돌과 검정 돌을 이렇게 저렇게 두고 싸우는 거 말이야."
"하얀 돌과 검은 돌을 들고 싸운다니 당최 모르겠네, 난……."
"……."

쟁기질하는 농부는 바둑의 바, 자도 모르는 사람과는 더는 얘기를 나눌 수 없어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어. 모내기가 한창인데 시시콜콜 바둑을 설명할 수는 없었거든. 담뱃대를 들고 있던 농부는 심통이 잔뜩 난 얼굴이었어. 하지만 어쩌겠어? 바둑이 뭔지도 모르는 게 죄지. 그래서 애먼 담배만 뻑뻑 피워대며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단다.

사실, 조정통은 과거에 장원급제할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야. 조정통이 벼슬을 하던 때 고려는 원나라와 친하게 지냈어. 원나라는 넓은 땅을 가진 아주 큰 나라였거든. 그런 원나라의 '세조'라는 왕이 바둑을 아주 좋아했어. 어느 날 고려의 사신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사신단 안에 조정통을 반드시 포함시키라고 명령을 내렸어. 조정통이 바둑의 신이라고 불릴만큼 바둑을 아주 잘 둔다고 원나라에까지 소문이 났기 때문이야.

아무튼 소문이 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용소 앞에 정자가 들어섰어. '수운정'이란 이름도 지어 붙였어. 수운정에는 종종 정갈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앉아 있곤 했지. 누가 봐도 문하시중을 지낸 조정통이 분명했어. 마을 사람들은 감히 정자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어. 워낙 지체 높은 사람이라 가까이 하기에 조금은 꺼림칙했거든.

조정통은 딱히 하는 일이 없었어. 간간히 용소 둘레를 돌거나 탐진강 주변을 산책하곤 했어. 나머지 시간은 정자에 홀로 앉아 바둑을 두었지. 바둑을 두자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고, 멀리서 찾아오는 친구도 없으니 그럴 만도 했어. 그렇지만 빼어나고 수려한 풍광을 보는 재미가 커서 그럭저럭 견딜 만했단다.

조정통은 「수운정」이란 시 한 편을 지어 읊조렸어.

하늘과 땅도 변하는데 사람인들 변하지 않으랴
흘러가는 세월조차 동정해주지 않으니
이내 몸은 점점 늙어만 가네
그간 의리와 정으로 사귄 친구 중에서
어느 누가 내 수운정을 찾아주려나
옛부터 지금까지 하나의 도리나 이치는
바둑판처럼 새롭기는 마찬가지다
이곳 호수까지 찾아와 수레를 멈춘 것은
예부터 금릉이 경치가 뛰어나게 좋아서이다
내가 떠난 후 수운정이 허물어졌다 말하지 마라
500년간 해와 달이 내 집을 비출 테이니.

유난히 바람이 선선한 어느 날이었어. 은어들이 물살을 거슬러 오르다 통통 하늘로 치솟았다가 떨어졌어. 갈대밭에 숨어있던 개개비들까지 갈대 끝에 앉아 햇볕을 쬐며 울어대고 있었지.

그러니까 시원한 정자에 앉아 바둑 두기 딱 좋은 날이었다는 거야. 조정통은 앞에 놓인 바둑판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어. 벌써 검은 돌과 하얀 돌이 어지럽게 집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고 있었지. 매일 그렇듯이 조정통 홀로 검은 돌을 두었다가 하얀 돌을 두고 있었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날창날창한 갈대처럼 긴장감이 돌고 있었단다.

느닷없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어.
"큰 곳보다는 급한 곳에 두라고 했지 않은가?"
"아! 그걸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그나저나 대단하십니다,
저보다 몇 수를 더 보고 계시니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허허허, 무슨 칭찬을 그리 과하게 하는가. 민망하게……."

 


틀림없이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였어. 그런데 바둑판 앞에는 조정통 혼자였다고. 가만 보니 조정통이 서로 다른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는 것처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거였어.
"패는 요술쟁이라는 말이 있던데……그 바둑 참……."
누군가 조정통 어깨 너머에서 넌지시 말을 건넸어.
"뉘, 뉘시오?"
조정통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지.
"……."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바둑판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어. 남루한 옷을 걸쳤지만 그냥 지나치는 훈수 정도의 말이 아니라서 조정통은 발딱 일어나 노인과 마주했어.
"아니, 옹께선 바둑을 좀 두시나 봅니다."
조정통은 남루한 노인을 높여 부르며 넌지시 떠봤어.
"뭐, 오다가다 훈수나 두는 실력입지요."
"보시다시피 혼자 두는 바둑인데……이미 한 번 따낸 곳인데도 되 따내는 방법이 기묘해서 해 본 소리입니다 그려. 앞으로의 패싸움이……."

노인은 아래로 길게 뻗은 하얀 수염을 어루만지며 대답했어.
말끝을 일부러 흐리며 바둑 따윈 잘 모른다는 표시를 내는 듯 보였어. 조정통은 가슴이 쿵 쿵 뛰었어. 모처럼만에 함께 바둑을 둘 적수를 만난 듯싶었거든.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콧방귀를 뀌었지. 사람들로부터 '바둑의 신'이라고 추앙받고 있고, 고려는 물론 원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치고 온 자신을 누가 감히 이길까 싶었던 거지.

조정통은 노인에게 슬쩍 물었어.
"혹시 가시는 길이 한참 남았습니까?"
"허허,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입니다."

노인은 탐진강 아래 바다 쪽을 가리키며 웃었어. 척 봐도 나루터 근처에서 살고 있는 늙은 뱃사공이 분명해. 조정통은 내심 잘 됐다 싶어 자세를 고쳐 앉았지. 노인도 조정통이 내준 자리에 얼떨결에 앉게 됐어.

노인이 점잖게 한 마디 했어.
"수가 얕으니 살살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이기자고 바둑을 두는 신은 세상에 없는 법입니다."

조정통은 은근히 자신이 '바둑의 신'이라 불리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듯 말했어. 노인은 별 대꾸 없이 가볍게 웃음을 띨 뿐이었지. 그렇게 조정통과 노인은 바둑을 두기 시작했단다.
"흠."

조정통은 뭔가 이상해 낮은 한숨을 내쉬었어. 도통 앞 수가 보이지 않는 거야.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진땀이 흘러내렸어. 평생 이리 깜깜하고 답답한 바둑은 처음이었어. 조정통은 노인을 흘끗 훔쳐봤어. 그런데 노인은 너무나도 편안한 얼굴로 아주 쉽게 바둑을 두는 거야. 마치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데다 냅다 두는 것만 같았어.

"더 이상 두지를 못하겠군요……."
조정통은 그만 포기하고 말았어. 그러면서도 멍하니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었어. 바둑의 신이라 추앙받고 있는 자신이 나루터 뱃사공 같은 노인에게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졌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거든.

조정통은 정중히 예를 갖추고 말했어.
"내일 다시 한 번 찾아주실 수 없는지요?"
"허허허,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데 백 번이라도 더 찾을 수 있지요."
"……."

조정통은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숙여보였어. 오늘은 귀신에 홀린 듯 뭔가 사정이 있는 법이라고 여기고 내일은 반드시 콧대를 납작 꺾어버릴 것이라고 속으로 다짐했어. 다음 날 노인이 똑 같은 시간에 찾아왔어. 남루한 옷깃에 물기가 촉촉한 걸로 봐서 방금 나룻배에서 내려서 온 것 같았어.

조정통은 어느 날보다 더 정숙한 옷차림과 정갈한 마음으로 노인을 기다리고 있었지. 무엇보다도 열 가지 바둑 비결 중 첫 번째인 '부득탐승'의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어. 이기려면 먼저 이기려는 마음을 버리는 뜻이었지.

조정통의 마음은 깨끗하게 비워진 듯 맑았어. 편안한 마음으로 노인에게 검은 돌을 내주며 첫수를 권했어. 실력이 낮은 사람이 검은 돌을 잡고 먼저 두는 것이기 때문에 조정통은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거야. 전날 처참하게 패하기는 했지만 말이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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