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차문화를 선도했던 '강진'
고려시대 차문화를 선도했던 '강진'
  • 강진신문
  • 승인 2020.03.2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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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 박사가 들려주는 우리차 이야기 2]

 

월남사지 발굴현장에서 이상한 물건이 하나 발견되었다. 높이 16.5cm, 폭 22cm, 두께 20cm의 돌로 깎아 만든 것이다.

위쪽에서 보면 한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고, 옆구리에도 구멍이 나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차를 가루 낼 때 쓰는 차맷돌의 일부라고 한다. 차맷돌은 암돌과 수돌로 이루어졌는데, 발견된 것은 암돌이다.

차를 가루낼 때 쓴 차맷돌이 월남사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으니, 고려시대에는 오늘날과는 다른 형태의 차가 만들어지고 음용되었다는 것이 짐작된다. 발굴된 월남사의 차맷돌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고려시대 차문화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역사상 우리나라 차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단연 고려시대이다. 불교문화의 융성과 더불어 차문화의 전성기를 누렸던 이 시대에는 왕족과 귀족, 관리, 백성들 모두가 일상에서 차를 마셨다.

차는 귀중한 물건으로 여겨져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으로 사용되었으며, 궁중에는 여러 행사를 준비하는 다방(茶房)이란 관청을 두었다. 그리고 궁중에 차를 공납했던 다소(茶所)와 사찰에 차를 공급하는 다촌(茶村)이 운영되었으며, 일반 백성들이 차를 사서 마실 수 있는 다점(茶店)을 설치하여 차를 마시는 풍속이 사회 전반에 성행하였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는 어떤 차를 마셨을까? 삼국시대에 만들어지고 음용되었던 떡차(餠茶)가 더욱 발전하여 연고차(硏膏茶)가 주를 이룬 것으로 알려져있다.

삼국시대 떡차는 찻잎을 쪄서 찧어 작은 떡모양으로 만들어 구멍을 뚫어 건조한 것이다. 불에 구어 가루를 내어 끓여 마셨다. 고려시대 연고차는 찻잎을 찐 뒤, 찻잎을 짜서 고를 빼 내고, 갈아서 작은 덩이차를 만들었다.

단단하게 덩이진 차를 마실 때 차 맷돌이 필요했다. 차맷돌에 곱게 갈아 체로 쳐서 찻사발에 넣고 차선(茶筅)을 이용하여 거품을 일으켜 마셨다. 이러한 음용법을 '점다(點茶)'라고 한다. 월남사에서 발견된 차맷돌은 단단한 단차를 가루낼 때 쓰인 물건이다.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전라도의 사찰'하면 월남사를 떠올릴 정도였다고 하니, 월남사의 규모를 짐작할만하다. 고려시대 월남사는 차문화의 공간이었으며, 그 곳의 승려들은 차문화를 향유하고 견인하는 주체였다. 월남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진각국사 혜심은 수많은 차시를 남겨 당시의 차문화를 짐작하게 해준다. 혜심의 차시를 한 수 감상해보자.

巖叢屹屹知幾尋  우뚝 솟은 바위산은 몇 길인지 알 수 없고
上有高臺接天際  위에 있는 높은 누대 하늘 끝에 닿았도가
斗酌星河煮夜茶  북두로 은하수 길어 한밤에 차 끓이니
茶煙冷鎖月中  차 연기 싸늘하게 달 속 계수나무 감싸네

북두질성으로 은하수 물을 떠서 차를 끓이고 차 연기가 달 속의 계수나무를 가린다고 하니 참으로 절묘한 운치가 있다.

고려시대 차문화 발달은 강진의 청자 다도구의 발전을 견인하였을 것이다. 월남사 발굴조사 결과 자기류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확인되고 있으나 고려시대 청자편이 주를 이루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대부분 수선사 국사들이 활동했던 13~14세기 청자들로 기종은 일상 생활용품인 대접과 접시, 잔, 병을 비롯하여 위세품의 성격을 갖는 향로와 의자, 화분, 베개, 약봉(藥棒) 등이 확인되었다. 차맷돌과 함께 잔과 약봉 등의 발견은 고려시대에 월남사에서 승려들이 직접 차를 만들어 음용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월남사는 인근에 월남원(月南院)이 있었을 뿐 아니라 성전에서 누짓재를 넘어 영암읍에 가는 길목이어서 교통상 아주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소규모의 청자는 해상 험조처인 '명량항(鳴梁項=울돌목)'을 피해 월출산 고갯길을 지나 영암의 조동포를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월출산의 월남사는 청자유통의 요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강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야생차 자생지를 보유하고 있다. 차문화를 향유하고 견인한 승려들과 고려청자의 발달 그리고 풍부한 야생의 찻잎을 토대로 강진은 고려시대 차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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