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포에서 왜구 무찌른 김흥업 장군과 아들 서봉 "
"남당포에서 왜구 무찌른 김흥업 장군과 아들 서봉 "
  • 강진신문
  • 승인 2020.03.16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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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등 작가와 함께하는 우리동네 옛 이야기 4]
남당포를 지킨 김흥업 장군(Ⅱ)

1597년 10월 11일이었어. 누렇게 물든 들판에서 간간이 추수를 하는 농부들도 보였어. 그날따라 맑았던 하늘이 우중충하게 변해갔어.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지. 그간 모으고 있던 정보를 따져 보니 오늘 밤에는 왜군이 남당포로 쳐들어올 것만 같았어.

김흥업은 의병들을 불러 모았어.

"어쩌면 오늘이 결전의 날일 수도 있다!"
"……."

의병들은 입을 꾹 다물고 몸을 곧추세웠어. 저마다 무기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어. 진작부터 결전의 날을 기다려왔기 때문에 겁도 저만치 달아나버린 것 같았어. 의병들은 김흥업 장군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어.

"우리가 애써 만들었던 비장의 무기들을 모두 남당포구 쪽으로 옮기도록 하라!"
"예이!"

의병들은 우렁찬 대답과 함께 흩어졌어. 그리고 김흥업 장군이 말한 비장의 무기를 굴리고 왔지. 바로 볏짚을 커다란 공처럼 동그랗게 말아놓은 거였어.

볏짚 안에는 솜뭉치들이 빼곡하게 들어 있어서 조총의 탄알도 뚫지 못할 정도였어. 의병들은 남당포구 쪽에 볏짚 공을 나란히 옮겨 놓았어.

날이 저물어갔어.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했단다. 달마저 먹구름 뒤에 숨어버린 탓에 먹물처럼 깜깜했지. 의병들은 볏짚 공 뒤에 숨어 숨도 크게 쉬지 않고 왜군을 기다리고 있었어.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마라!"
"예이!"

갈대가 서걱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어. 물살까지 잔잔해 파도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가끔씩 갈대 속에 숨어있는 개개비가 날개를 조심스럽게 파닥일 뿐이었지. 의병들에게도 슬슬 졸음이 몰려올 시간이었을 거야.

'화르륵, 팟! 팟!'
갑자기 남당포구 앞 바다에서 횃불들이 켜지기 시작했어. 횃불은 수백 개가 넘는 듯 사방이 대낮처럼 환해졌어.

왜군들이 배를 타고 쳐들어온 거야. 만약 저 군선들이 남당포구에 닿기만 하면 강진 땅은 왜군들로 뒤덮어버릴 정도였어. 의병들은 기가 질려 까무러칠 정도였어.

"와아!"
왜군들의 함성 소리가 벼락처럼 들려왔어. 김흥업 장군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의병들에게 소리쳤어.

"명령을 기다려라!"
수십 척의 왜군들의 군선이 쏜살같이 남당포구로 달려들었어. 왜군들의 기세에 눌려 의병들이 벌벌 떨기 시작했어. 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다닥다닥 들려왔고, 끙끙 앓는 신음소리도 들려왔지.

'탕! 탕……탕탕탕!'
조총의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왔어. 그렇지만 볏짚 공 뒤에 숨어있는 의병들을 죽이지는 못했어. 총알이 볏짚 공 안에 있는 솜뭉치에 감겨 뚫고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 사이 왜군의 군선이 거의 남당포구에 다다랐어. 김흥업 장군이 때를 놓치지 않고 명령을 내렸어.

"볏짚 공에 기름을 부어라!"
"예이! 와아!"

의병들은 그제야 함성을 지르며 기름 바가지를 볏짚 공에 붓기 시작했어. 서봉은 의병들의 뒤를 뛰어다니며 낮게 외쳤어.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움직이지 마라!"
왜적의 군선이 일제히 남당포구로 미끄러지듯 들어왔어. 김흥업 장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레와 같은 명령을 내렸어.

"볏짚 공에 불을 붙여라!"
"예이!"

의병들은 앞 다퉈 볏짚 공에 불을 놓았어. 그러고는 긴 막대로 포구 아래로 밀쳤어. 커다란 불덩이 같은 볏짚 공이 활활 타면서 아래로 굴러 떨어졌어.

불덩이들은 그대로 왜적의 군선으로 굴러갔어. 순식간에 왜적의 군선은 불에 휩싸이고 말았단다.

"으아, 으아악!"
여기저기에서 왜군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어. 의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활을 쏘기 시작했어. 환한 불빛 아래에서 화살을 맞은 왜군들이 픽픽 쓰러졌어.

불이 붙은 왜군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속으로 뛰어들었지. 삽시간에 남당포구는 아수라장이 돼버렸어.

"돌격하라!"
김흥업 장군의 최후의 명령이 떨어졌어.

"와아! 모조리 죽여라!"
"철천지원수들을 몰리치자!"

의병들은 왜군들에게 들불처럼 달려들었어. 배에서 뛰어내려 포구로 기어오르는 왜군들과 한바탕 전투가 벌어졌어. 시커먼 연기로 휩싸인 남당포구에는 총소리와 칼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로 꼭 지옥 같았단다.

김흥업 장군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왜군을 물리쳤어. 그러나 가만히 당하고 있을 왜적이 아니었어. 왜적들은 금방 김흥업 장군을 알아봤어. 그래서 집중적으로 김흥업 장군을 노리고 달려들었어.

"헉!"
총탄 한 알이 김흥업 장군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어. 장군은 앞으로 풀썩 고꾸라지며 비명을 질렀어. 그러면서도 바닥에 박힌 칼에 기대어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섰어. 아들 서봉이 멀리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달려왔어.

"아버님!"
서봉은 아버지를 부축하여 뒷걸음질을 쳤어. 김흥업 장군이 총에 맞은 것을 확인한 왜군들이 한꺼번에 달려왔어. 서봉은 죽을힘을 다해 왜군들과 맞섰어. 그렇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여러 명의 왜군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단다.

"윽! 아, 아버님……."
왜군의 칼이 서봉을 베고 지나갔어.

"서, 서봉아……!"
숨이 꺼져가던 김흥업 장군도 피를 토하며 아들의 이름을 불렀어. 그러고는 마지막 힘을 다해 서봉을 껴안았어.
그렇게 둘은 목숨이 다해 풀썩 쓰러지고 말았단다.

"장군님!"
"서봉 도련님!"

그제야 멀리 떨어져있던 의병들이 몰려왔어. 의병들은 남아 있던 왜군들을 하나 둘 물리치기 시작했어.

"퇴각하라!"
어디선가 왜적의 장수가 후퇴 명령을 내렸어. 그때까지 살아 남은 왜군들은 뿍뿍 기어서 남아있는 군선에 올라타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어.

수십 척의 왜선들이 불에 타서 바다 속에 가라 앉고 있었고, 몇 척의 배만 겨우 겨우 남당포구에서 멀어지고 있었단다.

의병들은 하늘로 무기를 치켜들고 외쳤어.
"와! 왜군들이 도망친다!"

모두들 얼싸안고 펄쩍펄쩍 뛰었지. 그렇지만 전사한 김흥업 장군과 서봉의 시신을 보고는 털썩 주저앉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어.

"장군님, 어흑흑!"
"도련님!"

왜군들이 물러간 남당포구는 울음바다가 돼버렸어. 숨죽이고 전쟁을 지켜만 보던 노인들과 아이들도 달려 나와 함께 울었어.

바다 위에 남아있는 잔불들이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어두워질 때까지 울음은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단다.

한 해 뒤 염걸 장군도 퇴각하는 왜군들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단다. 두 아우들과 노비들도 함께 전사했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도 전사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왔고 말이야.

그렇지만 이런 숭고한 죽음 덕분에 왜적들은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단다. 정유재란이 드디어 끝이 난 것이었지.

정유재란이 끝나고 난 뒤 1605년 염걸 장군은 병조판서로 이름을 올렸어. 장군이 살던 집에는 붉은 문을 세워 그의 충정을 온 세상에 떨쳤지.

그 뿐만 아니라 함께 전사한 염걸 장군 삼 형제와 아들을 위한 '사충묘'가 들어섰어. 그 아래 함께 죽은 노비들의 묘인 '충노의 묘'도 있었지.

그렇게 염걸 장군과 아들 그리고 장군의 두 동생은 정유재란 2등 공신 이름에 올라갈 수 있게 됐어.

하지만 남당포구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막아내는 덕에 강진읍과 병영성까지 지킨 김흥업 장군과 김서봉의 이름은 공신록 어디에도 올라가지 않았어.

장군과 아들 서봉의 공적을 입증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지. 다만 『김덕란 의병장 순절록』에 짤막하게 기록됐을 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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