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기념사업회를 이끌다
해상왕 장보고 기념사업회를 이끌다
  • 강진신문
  • 승인 2020.03.0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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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만의 강진이야기] 동원그룹 김재철 명예회장(5)
김재철 명예회장이 다산강좌에서 지역주민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 해상왕 장보고 기념사업의 발족

9세기에 씌여진(입당구법순례기행기)에서 저자인 엔닌 스님이 장보고에 올린 편지에 의하면 당시 일본인이 당나라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장보고의 해상 루트를 이용해야 하고 신라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특히 엔니 스님이 당나라에 체류할 수 있게 된 장보고를 비롯한 신나라의 도움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9년 반만의 귀국길에도 신라의 도움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들의 길 안내를 통한 완도를 경유해 일본에 도착했다고 증언한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라이샤워 교수는 장보고를 해양 상업 제국의 무역 왕자 또는 해외 조계지를 지배한 총독으로 평가했다. 우리 역사에도 비즈니스맨으로서 이렇게 훌륭한 분이 계셨다는 생각을 김재철 회장이 갖게 된 계기의 시기가 1990년 전후였다고 한다. 국내 언론에 장보고 관련 기사가 집중적으로 실릴 때부터이다.

장보고에 대한 김재철 회장의 생각은 일찍이 장보고를 살리기 시작한 김성훈(중앙대교 전(前) 농림부장관)이 발표한 연구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 장보고의 청해진 조직은 병부(군사체제), 민부(무역 체제) 정당. 제일 신라인 집단 거주지의 자치체제 등 세 개의 조직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는 오늘날의 이른바 군사 복합제 종합상사의 성격이 짙다고 했으며 장보고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청해진 세력은 단순히 한, 중, 일을 연결하는 국제 무역에 그치지 않고 중국 내의 남북 무역을 담당하고 나아가 저장성 푸젠성 및 양쯔강 일대에 진출해 있던 페르시아 및 동남아시아 상인들과의 상거래도 주도한 것으로 보이며 장보고 상단(종합상사) 국제 통상 지식과 정보력은 당시로써는 상상을 뛰어넘는 우수한 수준이었으며 단순히 무역 업무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라 정무무역의 대행 구국 정부 공식 사절 안내 여객 운동 선박 전도와 수리 한, 중, 일 통역 및 선원 재공 종교문화 지원 등 각종 서비스 및 문화 사업까지 겸하여 수행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해상왕 장보고에 대한 재조명 및 평가 사업은 1998년 해양수산부 내에 장보고 기획단이 설립되면서 본격화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장보고의 복원사업도 해양수산부라는 독립 부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해양 수산부는 1999년 10월 학계 및 관련 업계 인사 100명으로 구성된 해상왕 장보고 재조명 평가 사업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이때 김재철 회장은 위원장을 맡게 된다.

훈장을 수상한 김재철 회장의 모습

이후 많은 해양인들의 지원과 관심 속에 재단법인 해상왕 장보고 기념사업회가 1999년 11월 설립되었다. 생전에 장보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던 고(故) 이병철 회장의 유지에 따라 삼성그룹이 16억 원을 기부함으로써 재단 설립에 종자돈이 되었다고 한다.

해상왕 장보고 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은 오랫동안 장보고 연구를 주도해 온 김문경이 맡았다. 그는 곧바로 김재철 회장이 자리를 맡도록 강력하게 요구한다. 이유는 학자들의 노력만으로 장보고 복원 사업을 꾸려 나가기가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장보고 연구는 오랫동안 해왔지만 추진력을 가진 경영자가 나서지 않는다면 효과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권유에 따라 1999년 12월에 김재철 명예 회장이 제2대 이사장에 취임하고 이후 11년간 사업회를 이끌어 왔다.

학계에서 장보고 연구를 시작한 사람은 1935년 무렵 한국사 학계의 태두 김상기였다. 이후 라이샤워와 김문경 장보고 연구를 추진했고, 1989년 11월에 장보고 해양 경영사 연구회가 발족되어 활동했지만 학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학계 원로들을 중심으로 김재철 회장이 추진하여 장보고의 현실적 의미를 우리 사회가 주목하도록 만들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김재철 회장은 어떤 시대에도 반드시 시대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며 그전 시대정신을 역사적인 인물이나 그 사례에서 배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는 이 시대가 장보고라는 역사적 인물을 부활시켜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그가 장보고에 부여하는 의미는 이렇다. 장보고는 당시 새로운 국제무역 질서의 태풍에 능력적으로 참가하며 동북아시아 경제 질서는 주체적으로 형성했으며, 동남아시아 물류 네트워크를 완성했고 이를 동남아 인도 향로와 연결해 세계 최초로 동서의 무역항을 하나로 묶는 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고향 강진에서 생산된 고려청자를 일본, 이슬람 등에 고가로 수출하는 등 무역의 고부가치화를 추진했다. 그는 장보고의 이러한 업적을 통해 우리나라가 장보고 정신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때 마침 김재철 회장은 한국무역 협회 회장직을 맡기 시작했다. 무역입국을 통해 선진국 진입이란 협회의 지향심과 역사 속의 장보고는 우리에게 역할 모델로 제시하는 귀한 자산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듬해 1993년 3월 해상왕 장보고 기념사업회가 해국 무역 센터에 재단 사무처를 두고 본격적인 사업에 들어간다. 김재철 회장은 이사장에 취임한 뒤 학술연구를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해상왕 장보고 연구회를 2000년 4월 24일에 발족시킨다.

본격적으로 장보고 학을 정립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연구회는 학술사업도 활발히 추진하는데 이는 평소 지적인 토대의 중요성을 강조한 김재철 회장의 철학을 반영한 결정이었다. 그는 대중화 작업 이전에 학술 작업이 생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1년부터 학술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장보고 연구 과제를 공모했고 장보고 연구 전문가 그룹을 지원했다. 이 결과 초기 3~4년 동안 여러 권의 자료집이 집대성되었다.

7~8세기 한, 일, 중 교역 연구 문헌 목록 및 자료집 해상왕 장보고의 국제 무역 활동과 물류 등은 초기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또한 구비설화 연구에서부터 해양 신앙 도서연구 이슬람과의 교역 연구 해양 경영의 전략 무역 불교 신당 차문화 등 폭넓은 국제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10년간 단행본 총 42종 63권을 펴냈고 판매용으로 17종-25권을 발간했다고 한다.

해상왕 장보고 기념사업회 한 축으로는 학술 작업을 통해 장시간에 걸친 장보고 학의 초대를 구출하고 다른 한 축으로는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활동했다. 우리 역사에는 이런 위인이 있다고 동북인의 중심국가로 발전하는데 장보고의 삶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대중의 마음속에 심을 필요가 있었다. 장보고를 국민에게 알리는 일에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교과서에 실린 김재철 명예회장의 선상일기

한 번은 김대중 전(前) 대통령이 조정제(해양수산부만 재임 1997년 8월 7일 ~ 1998년 3월 2일)에게 김재철 회장을 청와대로 부르라고 했다. 대통령이 말했다. "김 회장 요즘 「왕건」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장보고를 드라마로 만들어보면 어떻겠나."

김재철 회장은 대답했다. "당장 드라마를 만드는 것은 어렵습니다. 드라마는 계속 인기를 유지해야 하는데 거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자칫 사실로서의 역사가 훼손될 수 있습니다. 좀 더 준비가 된 뒤에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김대중 전(前) 대통령은 그러면 그렇게 해보시오 라고 했다. 나오는 길에 조정제 장관이 놀란 듯 (그에게) 말했다. "김 회장은 대통령 앞에서 안됩니다 라고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대통령 앞에서 사업가라면 누구나 그렇게 한번 해보겠습니다. 라고 답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김재철 회장은 상대방이 누가 되었든 일에 선후를 따진 뒤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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