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차문화의 산실 '강진' 왜 강진이어야 하는가!
한국 차문화의 산실 '강진' 왜 강진이어야 하는가!
  • 강진신문
  • 승인 2020.02.24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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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 박사가 들려주는 우리차 이야기 1]

 

강진은 우리나라 차문화의 본고장이다. 오늘날 차산업적 측면에서 보성과 하동에 밀려 다소 소외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단연코 우리나라 차문화의 본고장은 강진이라고 할 수 있다.

강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유구하고 뚜렷한 차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차문화가 융성했던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고려시대 진각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월남사(강진군 성전면 월남리)는 찻잎, 인물, 차도구 등 차문화의 3박자를 모두 갖춘 곳이었다. 월출산에서 공급되는 풍부한 야생의 찻잎, 차문화를 선도했던 승려들, 고려청자 다도구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로 인해 차문화는 새로운 양상을 맞이하게 되었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차문화는 많이 쇠퇴하였다. 그러던 차에 조선후기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은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등과 차로 교유하였고, 직접 차를 만들어 음용함으로써 조선후기 차문화를 부흥시켰다.

오늘날 흔히들 말하는 '구증구포' 제다법은 다산이 처음 사용한 제다법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후기 차문화 부흥의 진원지는 바로 강진이었던 것이다.

다산은 해배되면서 제자들과 다신계를 맺음으로써 강진의 차문화가 지속되도록 하였다. 다산의 막내제자 이시헌 가문에서는 스승과 차로 맺은 약속을 대를 이어 지켰다.

스승과의 약속을 100년 이상 지켜오던 차가 일제강점기 우리차의 자존심을 지킨 '백운옥판차'로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백운옥판차는 '신의'의 차, '애국' 또는 '독립'의 차로 불려진다.

백운옥판차는 민족자본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차협동조합의 산물이며, 최초의 차 상표이기도 한다. 더욱이 고려시대 월남사, 조선후기 차문화 부흥, 다산 정약용과 백운동별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백운옥판차는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

이한영 선생 일가는 조선후기부터 월남사지3층석탑 앞에서 살았는데, 그 자리에서 고려시대 유물인 다마(차맷돌)가 발굴되었다.

천 년 이상 차향이 흘러온 것이다. 백운동별서는 다산이 수없이 다녀간 곳이며 다산과 주고받은 편지가 수 십 통 남아 있다.

다산의 막내제자 이시헌은 다신계 약속대로 스승에게 차를 만들어 보냈으며, 그 약속은 대를 이어 지켜졌다. 이한영은 어린시절부터 다산가에 차를 보내오다 40대 초반 일제강점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차가 일본차로 둔갑하는 현실을 개탄하여 '백운옥판차'라는 최초의 상표를 만들었다.

아모레퍼시픽에서 1980년대부터 강진 월출산 남쪽 일대에 대단위로 다원을 조성하였다. 그러면서 '백운옥판차', '금릉월산차' 등 이한영 선생이 만든 상표를 모두 등록하여, 강진에서 그동안 사용할 수 없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상표는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기업에서 상표를 잘 보관하였기에 다시 강진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보성군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대단위로 조성해놓고 떠난 다원을 발 빠르게 산업적으로 이용하여 녹차수도로서 위상을 높였으나, 현재 내면적으로는 역사성이 없어 고민하고 있는 상태이다. 어떻게 해서든 역사의 한 자락이라도 잡아 스토리텔링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와 반면 강진군은 다산 정약용 - 이시헌 - 이한영으로 이어지는 가장 뚜렷한 한국전통차의 맥을 갖고 있으며, '백운옥판차', '금릉월산차'라는 브랜드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와 문화는 상품에 생명을 불어넣어 가치를 높인다. 강진은 역사적으로 늘 차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다시 한 번 한국차의 네오르네상스가 강진에서 일어나길 꿈꾸어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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