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현감 밑에서 마음씨 넉넉한 이속 나온다"
"어진 현감 밑에서 마음씨 넉넉한 이속 나온다"
  • 강진신문
  • 승인 2020.02.0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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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등 작가와 함께하는 우리동네 옛 이야기 2] 강진읍 소코뚜레 연못(Ⅱ)

 

그때였어.

"이렇게 성을 안쪽으로 들여 넣어버리면 동문 샘은 성 밖에 위치하는 거 아닙니까?"

강진읍의 좌수 영감이었어. 고을에서 덕망이 가장 높은 어른을 좌수로 임명하였는데, 좌수는 현감이 하는 일을 돕거나 혹은 잘 못된 일은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어.

"헉!"
공방을 비롯한 이속들은 그제야 설계도를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어. 원래의 성벽이 수백 보 안으로 들어와 있었기 때문인지. 만일 그렇게 성을 쌓는다면 예전에 성 안에 있던 동문 샘이 성 밖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꼴이 돼버리지 뭐야.

신유는 좌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어.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세긴 했지만 허리가 꼿꼿하고 눈은 아주 맑았어. 그윽하게 깊은 눈 속에서 어떤 사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어. 신유는 속내를 들켜버린 것 같아 뜨끔했어. 그렇다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지.

신유는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어.
"좌수 어른!"
고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신유는 좌수를 깍듯하게 높여주었어. 그러면서 멀리 보이는 바닷가를 가리키며 대답을 이어갔지.

"왜가리가 부리를 날개에 파묻고 한 발로 서 있는 건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그렇고 말고요."

이속들은 적잖이 놀랐어.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이치에 맞지 않으면 한없이 깐깐한 좌수가 현감의 말에 맞장구까지 치다니 믿을 수 없었던 거야.

이제 명망이 깊은 좌수까지 허락한 셈이니 서둘러 성을 쌓는 일만 남아있었어. 성은 금세 완성됐단다.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지. 신유는 일부러 좌수를 옆자리로 정중히 모셨어. 좌수도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예의를 갖췄어.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서로를 존중하며 지내온 것처럼 느껴졌어.

신유가 먼저 술잔을 권하며 너털웃음을 웃었어.
"지난 번 너그럽게 넘어가주셔서 무척 고마웠습니다. 허허허!"
"넘어가다니요, 마땅히 그럴만해서 저도 눈감았습니다. 허허허!"

좌수도 현감 신유 따라 호탕하게 웃었어. 신유가 자세를 바로 고쳐 앉으며 넌지시 물었어.
"그럼, 제가 성을 안쪽으로 들여 놓은 이유를 아셨단 말씀이지요?"
"글쎄요, 그리 보입니까?"

좌수는 멋쩍은 나머지 되물었어.
"허허, 그리 보여서 묻는 거 아닙니까."
"현감께선 아마 오늘부터 이속들의 눈부터 살피실 겁니다."
"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와우형국의 풍수지리로 따지자면 동문 샘은 소의 왼쪽 눈에 해당됩니다. 눈을 당연히 성 즉 얼굴 밖으로 빼버렸으니 한 쪽 눈밖에 없는 셈 아니겠습니까. 현감께서 들은 소문에 드세고 고집 센 소는 바로 강진의 이속들로 알고 있을 테니까요."
"허어!"

신유는 무릎을 탁 치며 감탄을 자아냈어.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말이었어. 신유는 드세다는 이속들의 눈을 멀게 하여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꺾어버릴 참이었거든. 그래야 다시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음에 부임할 현감들에게 고분고분 굴 테니까 말이야.

신유는 조급한 나머지 다급하게 물었어.
"그럼, 연못을 판 이유도 알겠군요?"
"소 콧구멍에 해당되는 곳인데 그곳에 연못을 판 뜻은 코뚜레를 뚫은 거나 마찬가지이겠지요. 이 또한 소문으로 드세다고 들은 이속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이유 아니겠습니까?"

"아……제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려."
"송구합니다."
"아니, 그걸 빤히 알고서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현감 나리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인지요?"
"때마침 불이 일어나 그 연못 덕을 톡톡히 봤으니, 그 연못은 꼭 필요했던 거나 다름없으니 하는 말씀입니다."

신유는 주변 눈치도 살피지 않고 좌수의 손을 덥석 잡았어. 풍수지리라면 조선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텐데,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만났으니 반갑고 존경스러울 수밖에.

좌수는 비둘기 바위 위쪽의 봉우리와 군동의 금사봉 봉우리를 깎은 이유도 알고 있었어. 겉으로 보기에 성을 쌓기 위한 돌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둘러댔었지만, 사실은 비둘기 바위 위쪽의 봉우리가 소의 양 뿔 사이의 급소였고, 금사봉은 풍수지리에서 안산에 위치했기 때문에 안산을 조금 낮춰 이속들의 성질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지.

신유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고 있던 좌수가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어.
"현감께선 괜한 노파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노파심이라니요?"
신유는 좌수가 자신을 괜한 걱정이나 하고 있는 노인 취급하는 게 언짢았어.

"어진 현감 밑에선 온순하고 마음씨 넉넉한 이속들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런데 강진에 부임한 현감들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임기 동안 백성의 피를 빨아 재산을 불릴 일만 생각했지요. 현감 나리도 아시다시피 이속들은 따로 나라의 녹(봉급)을 받지 않고 세금을 걷는 데다 이속들의 녹을 조금 얹혀 거둬서 살아가고 있는데, 현감의 욕심대로 세금을 걷었다간 이 동네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웃 모두가 친척이나 다름없이 가까운 사이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현감 나리들의 터무니없는 말을 따르지 않고 온갖 그럴싸한 이유를 대 맞서왔던 것입니다.

그런 행동들이 현감 나리들께는 황소처럼 고집이 세고 드세다고 느껴져 소문이 퍼졌다고 생각합니다."
"허어……."

신유는 좌수의 장황한 말을 다 듣고 나서 깊고 낮게 한탄했어. 소문만 듣고 어리석게 굴었던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신유에게 좌수가 위로의 말을 건넸어.

"하지만 현감 나리는 전 현감들과는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까."
"뭐가 다르다는……."
"연못을 판 것도 바위를 깎아내 성을 튼튼하게 다시 쌓은 것도 다 강진의 백성들을 위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불의에는 황소처럼 드센 강진의 이속들이 고분고분 현감 나리를 잘 따를 수밖에요."

"허허……이거, 원 참!"
신유는 부끄러운 나머지 뙤약볕에 잘 익은 고추처럼 얼굴을 붉혔단다. 그때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이속들이 신유 앞으로 우르르 몰려왔어. 그러고는 저마다 술잔을 채워 신유에게 권했지.

"현감 나리, 한 잔 받으시지요."
"하하! 고맙네, 고마워. 눈병이 나거나 눈이 멀지 않아서 말이야."
이속들은 뜨악한 얼굴로 신유에게 되물었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신유는 좌수와 눈을 마주치며 목젖이 다 보이도록 호탕하게 웃으며 술잔을 마주쳤단다.
"하하하! 눈에 병이 나지 않아야 나 같은 탐관오리를 잘 감시할 거란 말일세!"
"농담도 과하십니다, 현감 나리!"

이속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서로 눈을 쳐다보았단다. 왜구가 쳐들어와도 끄떡없는 읍성 완공을 위한 잔치도 점점 무르익어갔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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