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정월 대보름
[다산로] 정월 대보름
  • 강진신문
  • 승인 2020.01.2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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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제 _ 수필가

지루한 추위가 물러가고 낮에는 따스한 봄기운이 양지쪽에 든다. 움츠렸던 마음도 함께 펴진다.

이때까지 설음식 쑥떡 인절미 떡국 떡국새미(장조림)술을 남겨두시고 형제 자식들을 기다린다. 친척 친구 멀리 걸어와서 찾아뵙고 가기 때문이다. 보름이 지나가면 세배하려고 오지 않는다.

대보름 달빛이 동산에서 비추고 올라올 무렵 할머니께서 미영(무명)씨를(이때만 해도 농가에서 밭에 무명을 심어서 이불도 만들고 무명베를 집에서 짜서 옷을 지어 입었다) 바가지에 담아 내주시면서 주막 다리 위에 가서 나이대로 뿌리고 왔다 갔다 건너며 건강과 소원을 빌고 오라고 하신다.

그때 이웃집 사는 달덩이처럼 예쁜 여자 친구 정순이가 나온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데 이때는 나와 만나면 너무도 마음 설레인다.

나는 정순이와 떠오르는 밝고 둥근 달을 함께 바라보며 슬며시 손을 잡으면 아버지가 기다리신다고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는 것을 아쉽게 물끄러미 본다.

열한 살 위인 삼촌은 한집에서 살면서 나를 무척 예뻐하셨다. 아버지 친구들이 집에 찾아와 삼촌보고 아버지 어디 갔냐고 묻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버지를 찾아온 사람은 나를 보고 아버지를 가리켜 형님 계시느냐고 물으면 알아듣고 아버지요 하곤 했다.

할머니께서 보름 전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하여 졸음을 참다 참다 잠을 못 이겨 자고 나면 나 보고 삼촌은 거울을 보라고 해서 보면 하얀 밀가루를 눈가에 발라둔 것을 모르고 울기도 했다.

아침에 눈 뜨기도 전에 삼촌이 윤제야 하고 부르며 오늘은 누가 부르면 내 더위 사가라 하고 대답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새벽 일찍 일어나 어제 마당에 쌓아 준비해둔 고춧대 가지대 대나무 옥수숫대에 불을 피우면  대나무는 불 속에서 펑펑 튀면서 불꽃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간다. 이때 나쁜 액도 함께 올라간다고 한다.

아침에 어머니께서 마루에다 조상님께 올리는 상을 차리신다. 술과 무 그리고 반쯤 말린 명태 찜 나물 토란국과 찰밥을 올린다.

팥 넣은 찰밥을 해우(김)로 주먹밥을 만들어 주시면서 디딜방앗간에(풍년을 기원한다는 뜻)가서 먹으라고 바구니에 담아주신다. 이때 귀 밝기 술이라며 한 모금 하라고 주시고 무도 귀 밝기 무라며 주신다.(일 년 내내 좋은 말만 들으라고) 그 술을 굴뚝에다 붓기도 했다. (조왕신 보름은 불과 관계있어 그런 것 같다) 

어머니께서 까치밥이라고 하여 넓은 대나무 바구니에 나물과 붉은 찰밥을 담아서 사립문 위에다 올려놓으면 새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구천을 떠도는 잡신이 먹고 간다 한다.

그리고 붉은 찰밥을 따로 남겨 두었다가 이웃 마을에 사는 벙어리 아줌마가 얻으러 오면 가난한 이웃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며 건네주신다. 

오후가 되면 정순이가 어머니 몰래 가져왔다며 해우로 싼 붉은 찐 밥과 볶은 콩을 가져와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양지쪽 언덕 아래서 나누어 먹고 한나절을 보낸다. 이때의 너무도 아름답고 순수함은 영원히 잊지 못할 행복이었다.

친구들과 대밭에 가서 썩은 대나무를 주어다가 깡통에 담고 철사를 연결해서 불씨를 넣고 돌리면 불이 살아나서 불꽃연기가 피어오르면 불꽃놀이를 즐긴다. 그리고 이웃 마을 친구들과 불 싸움 놀이를 하다 머리가 터지고 다치는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 어른들은 매구를 치고 집집마다 액막이 지신밟기 놀이를 하면은 술과 안주로 닭죽을 내놓는다. 그러면 이 집에 복이 물 묻은 바가지에 깨 달라붙듯이 하고 못 쓸 액은 구강포로 흘려보내라 한다.

밥상에 쌀 한 그릇 찬물 한 그릇 올린 후 촛불을 켜고 명주실 타래를 감아두고 돈도 올려놓는다.(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함이다) 

논 밭둑에 꿈틀거리는 해충을 잡는다고 불을 놓는다. 그러면은 아지랑이 속에 봄 불은 보이지도 않고 탄다. 이때는 산 불 날 일이 없다.

산과 들의 나무를 긁어다가 아궁이에 불 때고 나무도 베어다가 아궁이에 군불 때고 밥해 먹는 등 연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음력 2월 초여드레 날이 자지 고부치 (고부: 곱다 추워서 손발이 곱다.) (치: 절기를 말하는 것 같다)라고 한다. 날씨가 따뜻하여 냇가에서 멱을 감고 바위 돌 위에 앉아 있다가 자지와 불알이 바위에 얼어붙어서 죽었다는 이야기다.

음력 2월 추위에 독아지가 튄다는 말이 있는 거로 봐서 2월 추위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음력 2월 1일은 허드레 날이라고 하여 칡을 캐다가 이빨이 검게 씹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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