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불꽃 영혼 사진작가
[다산로] 불꽃 영혼 사진작가
  • 강진신문
  • 승인 2020.01.0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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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권 _ 수필가

어느 날 나의 시선은 도서관 진열대에 꽂혀 있는 한 권의 책에 멈췄다.『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책이었다. 사진에는 문외한이지만 책을 펼쳐본 순간 작가의 별난 이력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서 이번 제주 여행 때 '두모악' 사진 갤러리를 찾았다. 불멸의 사진작가 김영갑(金永甲, 1982~2005)이 남기고 간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본디 예술을 전공으로 하지도 않았고 사진을 직업으로 삼았던 사람도 아니었다. 공업계 고등학교 출신으로 우연한 기회에 사진과 인연을 맺고 마지막 순간까지 사진과 함께하였다.

그는 20대 중반 제주의 자연과 결혼하여 들판과 바다를 일터 삼아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치열하게 표현하며 살아가던 중 루게릭병에 걸려 힘겹게 싸우다 40대 후반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전 작품이 오롯이 전시되어 있는 한라산 중턱 '두모악 사진 갤러리'는 그가 1985년 정착하면서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 제주도에서 찍은 20만여 장의 사진 중 대표작이 전시된 장소이다. 겨울이면 맨몸으로 칼바람에 맞서고, 여름이면 장마에 곰팡이와 맞서며 살았던 곳이다.

어둠침침한 폐교의 교실과 운동장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 되어 비가 새고, 화단은 온갖 잡초들이 우거져 있었다. 2002년 교실 여덟 칸을 임대해서 개조하여 아기자기한 사진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사진 전시장에는 제주의 오름과 중 산간 지역, 마라도, 해녀, 들 구름, 산 바다, 나무와 억새를 주제로 한 사진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의 사진을 바라보면 박제된 들짐승이나 날짐승을 찍은 정지된 사물이 아니다.

날렵한 말이 거친 들판에서 깃을 세우고 숨을 몰아쉬며 힘차게 뛰어가고 있는 모습, 깃털이 화려한 수꿩이 숲속에서 즐겁게 노래하는 모습, 순백의 저어새가 푸른 바다 위를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생생한 모습은 마치 동영상을 보는 것처럼 살아서 움직인다.

김영갑은 이렇게 말했다. "같은 곳을 삼백예순다섯 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도 갈 때마다 새롭기만 하다" "한 순간을 위해 기다림은 매일매일 반복된다" "사진은 내 삶과 영혼의 기록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는 일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에 한 컷을 잡기 위해 태풍을 기다리며 열흘 동안 마라도에서 민박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사진작가가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의 렌즈에 담기 위해 분투노력할 때, 이 순간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며 보람이다" 그의 작품에는 뜨거운 생명의 맥박이 흐르고 있다.

젊은 시절 나는 주변 사람들이 사진기를 메고 다니는 것을 너무 부러워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나도 작품 사진을 찍어 보겠다며 월급을 몽땅 털어 고급 사진기를 구입해서 휴일이면 명산과 사찰을 몇 번씩 찾아다녔다. 그러나 셔터만 누른다고 멋진 작품이 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자연을 필름에 담는다는 것이 얼마나 진지하고 어려운지 그 때 경험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란 말이 증명해 주듯이 사람이 태어나 한 평생 살다 남다른 족적을 남기고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디에서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사진작가 김영갑, 그는 남에게 인정받기보다 자신에게 인정받기를 원했으며, 내일을 기약하지 않고 오늘을 최후처럼 살았던 예술인이었다. 그는 17회나 개인전을 열었지만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고, 작품을 팔지도 않았다. 그의 작품과 전시회에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관람자의 사유 공간을 제한하지 않고, 배려해 주기 위해 여백으로 남겨둔 것이다.

김영갑, 그는 자연과 물아일체되어 절대 빈곤과 고독 속에서 짧은 생을 불꽃의 영혼으로 승화시키며,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길을 찾은 위대한 예술가로 후세에  빛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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