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업의 가능성에 눈을 뜨다"
"금융업의 가능성에 눈을 뜨다"
  • 강진신문
  • 승인 2019.12.3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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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만의 강진이야기] 동원그룹 김재철 명예회장(3)
김재철 명예회장이 다산강좌에서 지역주민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동원그룹 김재철 명예회장이 지난 7월 제261회 강진다산강좌를 통해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주제로 참석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유익한 강연을 펼쳤다. 김재철 회장은 강진 출신의 성공한 기업인으로 어선 2척에서 시작해 동원그룹을 현재의 수산업계 리더로 성장시킨 1세대 창업 회장이다. 50년간 일선에서 동원그룹을 이끌어오다 지난 4월 퇴임했다. 김 명예회장의 모습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그려본다/편집자 주

2006년 미주지역 유치단 파견을 시작으로 총회가 열리기 전까지 김재철, 정몽구 현대자동차회장(명예위원장)을 비롯한 삼성, LG, SK, 한진 등 최고경영자들로 구성된 유치위원들과 함께 회원국을 방문한다.

유치위원들은 비행거리만해도 지구 42바퀴를 돌 정도로 열심히 뛰었으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유치위원회를 이끌면서 유치권을 펼쳤으며 그 결과 2007년 11월 26일 파리에서 열린 제162차 국제박람회 사무기지(BIE)총회에서 2012년 세계박람회 개최지로 여수가 결정되었다.

최종결과는 여수77표, 모로코탕헤르가 63표였다.

여수가 유치전에서 승리한 요건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해보면 물론 세계의 분위기가 우호적이긴 했지만 결정적인 요인 가운데 하나를 언급한다면 적임자를 잘 뽑았기 때문이 아닐까?

김재철회장을 전진 배치시켰기 때문이라 자평했다. 평생 동안 조직을 이끌면서 갈고 닦은 실력이 유치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한다. 김재철회장은 늘 성공의 결정적 요인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했으며 물론 그도 승리하지 못할 때는 이점에서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김재철회장은 2008년 2월22일에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영예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아래등급인 국민훈장모란장은 이미 1998년도에 받은 바 있다.

또한 김재철회장은 건실한 기업 활동을 통해 수출증진에 기여함으로써 기업인이 받을 수 있는 산업훈장 가운데서 금탑산업훈장(1991), 은탑산업훈장(1986) 그리고 동탑산업훈장(1982)을 모두 받은 바 있다.

이 모두가 사람들에게 바다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렸기 때문이다. 바다개척을 통해 우리가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음을 증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상계'와 '신동아'에 발표한 글 가운데 일부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남태평양에서'나, 초등학교 4학년 국어 '바다의고가' 그리고 '거센 파도를 해치고'가 고등학교 2학년 국어에 소개된 것이 대표적이다.

김재철회장의 삶이 진한 감동을 주는 까닭은 평탄함 속에서 흘러온 인생이 아니라 굴곡과 험난한 속에서 만들어낸 인생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김재철회장은 위기를 돌파해 내려는 기백과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 점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의 삶은 시대를 넘어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 교훈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인생의 표본이다.

◎ 금융업의 가능성에 눈뜨다.
"나는 좀 더 많이 알고 싶다", "나는 더 성장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분주함 속에도 집중해서 생각하고 느낌으로써 엄청난 기회를 잡는다.

김재철회장은 바쁜 시간을 쪼개서 서울대 AMP과정을 수료하는데 이는 하버드AMP과정으로 이끄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라고 한다. 그는 서울대AMP과정에서 언젠가 하버드에 가서 케이스 스터디를 듣겠다고 결심했다. 국내에서는 매년 두 사람 정도가 갈 수 있는 좁은 문이다.

당시 아시아에서는 일본만 4개가 있었고 한국과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에는 두 명만 자리가 있었다. 공직자 중에서는 최각규 전 경제 부총리가 기업가로서는 김재철회장과 참여하게 되었다.
연수에서 포착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증권업의 가능성이다. 미국에서는 젊고 똑똑한 친구들이 대부분 금융업에 뛰어드는데 그 모습이 그에게는 생소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증권업 같은 금융업은 그다지 미래가 좋지 않았기에 당시에 그가 증권업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버드AMP과정에서 그는 증권업 기회가 주어지면 한번 도전해 볼 만한 사업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어렵게 시간을 내어 방문한 하버드AMP연수에서 두 가지를 얻는다. 하나는 로스앤젤레스의 스타키스트에서 발견한 참치 캔의 사업화 가능성이라 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김재철회장의 증권업진출은 정교한 전략에다 이루어진 일이라기보다는 시대변화의 길목에서 낚아챈 기회였다고 했다. 물론 준비가 되어있기도 했지만 운도 따랐고 하늘의 도우심도 있었다. 그는 두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1981년 6월부터 시중은행의 민영화에 따라 삼보증권 동양증권과 함께 국내 대표적 증권사인 한신증권이 매몰로 시중에 나왔다.

이 회사는 1968년12월에 한국 신탁은행의 전액출자로 설립되어 1976년 6월부터 서울신탁은행을 비롯한 5개 시중 은행이 공동출자해 자본금 5-억 원으로 운영되는 회사였다.

한신증권의 매각공고가 나왔을 때 김재철회장이 충분히 준비가 된 상태는 아니었다. 예상 낙찰가격은 70억 원대로 추정되었지만 동원산업의 자본금은 20억 원밖에 없었다. 자본금 20억 원의 회사가 70억 원 규모의 회사를 매입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동원산업은 내부 유보금이 확보되어서 어느 정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만한 일이었다.

여기에다 자산 재평가를 하면 자본금의 몇 배나 되는 내실 있는 기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업은 운도 따라주어야 한다. 김재철회장이 한신증권을 인수하는 입찰과정은 흥미진진하게 이루어졌다. 입찰에 태평양 화학미릉건설 그리고 동원산업이 참여했다.

지명도 면에서 앞의 두회사가 단연 앞섰고 둘 가운데 한 회사가 인수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를 확인하자 동원산업은 71억2000만원, 태평양화학은 71억 750만원 그리고 시륭건설은 71억1250만원의 입찰가를 레이했다. 250만원의 간발의 차이로 한신증권을 인수했다.

입찰관계자 및 재계 관계자들은 도대체 동원산업이 어떤회사인가?라고 술렁거릴 정도였다고 했다. 1982년 인수당시 한신증권의 납인 자본금은 56억 원이었다. 1986년에는 200억 원으로 늘어나고 이후 1988년에는 450억 원으로 그리고 1989년에는 775억 원으로 늘어난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89년에는 1620억 원으로 1995년에는 1795억 원으로 늘어난다.

재벌 그룹처럼 많은 계열사에서 돈을 벌어들이는 구조가 아니었다. 바다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증권업을 키우는 일에 매진됐다. 1990년 까지만 해도 동원증권의 업계순위는 4-5위였는데 이후 다소 낮아졌지만 장남인 김남구 부회장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이런 추세를 반전시키며 업계 선두로 올라서게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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