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小雪)도 지나 만산이 붉은 단풍으로 물든 며칠 전. 선영의 산소에 형님을 안장시키고 내려오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내려오는 길목의 저수지 가에 세마지기 산골 다랑치 논이 눈에 들어왔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형님이 직접 지으시던 논이다.
거기서 그 옛날 어렸을 때 형은 바지게를 받쳐 놓고 논두렁에서 풀을 베고 나는 냇가에서 소를 먹였다.
그리고 저수지에서 함께 목욕을 한 후 땅거미가 깔리는 골짜기를 내려왔었다.
구학(한문)을 많이 하신 형님께선 생각하시는 것이 조금 남달랐다.
형님은 말했었다. " 너와 나 이 세상에 단 둘 뿐이다. 내가 죽으면 너 하나 네가 없으면 나 하나, 아버님 어머님 우리 키우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으니 이제 어떻게든 우리가 효도해야 하지 않겠냐?" 앞부분은 우애고 뒷부분은 효였다.
유교적 인습에서 아무렇게나 하시는 말씀이었으나, 그러나 그것은 내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어 지금까지 살면서 잊어 본적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못했다. 남들보다 아주 더 못사는 것도 아니었지만 졸업 무렵 연이은 가고(家苦)가 많이 생겨났다. 설상가상 형은 군대를 갔고 누나는 시집을 갔다. 밑으로는 내가 돌보아야 할 어린 여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아버님은 중학교를 내년에 가라고 하셨다.
이듬해가 되었다. 진학은 하고 싶은데 그래도 집안의 처지는 바뀌지가 않았다.
중학교 진학을 체념하고 있던 어느 날 형님한테 편지가 왔다. 항상 편지의 두문은 '아버님 전 상서' 였다.
형님은 글씨뿐 아니라 글도 잘 쓰셨다. 그날의 편지 내용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를 중학교에 진학시키라는 아버님께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제대하고 집에 가서 모든 학비 당신이 벌 테니 진학을 시키라는 것이었다.
수년이 지났다. 어느 날 둘이 마주 앉은 술자리에서, 옛날 얘기를 하면서 그 때 형님 때문에 중학교를 가게 됐었다는 말을 했다.
형님이 말했다. 군대서 카츄사 즉 미군 부대로 떨어지셨단다. 그런데 교관이 고향에 편지하라며 칠판에다 소속부대 주소를 영어로 적어 놓았다.
그런데 그것을 쓸 줄 몰라 그리듯 하고 있는데 다 쓰기도 전에 칠판을 닦아 버리더라는 것이다. 그때 눈앞이 캄캄해 지셨다고 하면서 울컥하셨다. 격정이 일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중학교를 가게 된 동기였다.
열한 살 차이의 형은 정신적인 지주이자 멘토였다. 고등학교시절, 그 당시 거의 대부분 청소년들이 그랬겠지만 나 역시 조금은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
겨울방학을 하여 집에 내려와 있던 어느 날 바다에 김을 뜯으러 가자고 했다. 그날따라 몹시도 추운 날씨였다. 겨울 바다는 더욱이나 매서웠다. 바람이 세차고 눈발까지 뿌렸다.
김을 뜯는데 마치 날이 선 칼로 손을 에이는 것 같았다. 통증에 이어 마침내는 마비가 왔다.
그때 생각했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고통스런 일이 있을까 하고-. 형님은 그 뒤로는 김을 뜯으러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을 뜯어본 경험은 내 삶에서 그때의 단 한번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 알게 되었다. 그때 형은 굳이 일을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니었고 농촌일의 어려움을 한번 체험하게 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김을 뜯어 돌아오는 배위에서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떨고 있는데 웃옷을 벗어 던져 주셨다. 당신은 노를 저으니 땀이 난다고-. 그때의 따뜻한 체온이 배인 옷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산비탈을 걸어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성년이 다 된 조카들과 어린 손자들이 앞서거니 뒷 서거니 했다. 애들 눈치 체일까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고 그대로 걸으니 자꾸 발이 헛 디뎌 졌다.
죽은 아내 옆에서 양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는 장자(莊子)얘기를 떠 올려 봤다. 그것을 읽으면서, 죽는다고 결코 울 일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애써 장자의 사상까지 기억해 내어 이를 악물어 보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나도 늙었기 때문이리라. 하나님! 내 형님 이 세상에 다시 오게 하실 때에는 고생 없는 곳에서 좋은 기(氣)를 받아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형님, 그때까지 부디 편안한 잠 드십시요.
김성한 _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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