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지나간 날들
[다산로] 지나간 날들
  • 강진신문
  • 승인 2019.12.1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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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_ 수필가

소설(小雪)도 지나 만산이 붉은 단풍으로 물든 며칠 전. 선영의 산소에 형님을 안장시키고 내려오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내려오는 길목의 저수지 가에 세마지기 산골 다랑치 논이 눈에 들어왔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형님이 직접 지으시던 논이다.

거기서 그 옛날 어렸을 때 형은 바지게를 받쳐 놓고 논두렁에서 풀을 베고 나는 냇가에서 소를 먹였다.
그리고 저수지에서 함께 목욕을 한 후 땅거미가 깔리는 골짜기를 내려왔었다.
구학(한문)을 많이 하신 형님께선 생각하시는 것이 조금 남달랐다.

형님은 말했었다. " 너와 나 이 세상에 단 둘 뿐이다. 내가 죽으면 너 하나 네가 없으면 나 하나, 아버님 어머님 우리 키우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으니 이제 어떻게든 우리가 효도해야 하지 않겠냐?" 앞부분은 우애고 뒷부분은 효였다.

유교적 인습에서 아무렇게나 하시는 말씀이었으나, 그러나 그것은 내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어 지금까지 살면서 잊어 본적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못했다. 남들보다 아주 더 못사는 것도 아니었지만 졸업 무렵 연이은 가고(家苦)가 많이 생겨났다. 설상가상 형은 군대를 갔고 누나는 시집을 갔다. 밑으로는 내가 돌보아야 할 어린 여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아버님은 중학교를 내년에 가라고 하셨다.

이듬해가 되었다. 진학은 하고 싶은데 그래도 집안의 처지는 바뀌지가 않았다. 
중학교 진학을 체념하고 있던 어느 날 형님한테 편지가 왔다. 항상 편지의 두문은 '아버님 전 상서' 였다.

형님은 글씨뿐 아니라 글도 잘 쓰셨다. 그날의 편지 내용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를 중학교에 진학시키라는 아버님께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제대하고 집에 가서 모든 학비 당신이 벌 테니 진학을 시키라는 것이었다.

수년이 지났다. 어느 날 둘이 마주 앉은 술자리에서, 옛날 얘기를 하면서 그 때 형님 때문에 중학교를 가게 됐었다는 말을 했다.
형님이 말했다. 군대서 카츄사 즉 미군 부대로 떨어지셨단다. 그런데 교관이 고향에 편지하라며 칠판에다 소속부대 주소를 영어로 적어 놓았다.

그런데 그것을 쓸 줄 몰라 그리듯 하고 있는데 다 쓰기도 전에 칠판을 닦아 버리더라는 것이다. 그때 눈앞이 캄캄해 지셨다고 하면서 울컥하셨다. 격정이 일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중학교를 가게 된 동기였다.
열한 살 차이의 형은 정신적인 지주이자 멘토였다. 고등학교시절, 그 당시 거의 대부분 청소년들이 그랬겠지만 나 역시 조금은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

겨울방학을 하여 집에 내려와 있던 어느 날 바다에 김을 뜯으러 가자고 했다. 그날따라 몹시도 추운 날씨였다. 겨울 바다는 더욱이나 매서웠다. 바람이 세차고 눈발까지 뿌렸다.
김을 뜯는데 마치 날이 선 칼로 손을 에이는 것 같았다. 통증에 이어 마침내는 마비가 왔다.
그때 생각했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고통스런 일이 있을까 하고-. 형님은 그 뒤로는 김을 뜯으러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을 뜯어본 경험은 내 삶에서 그때의 단 한번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 알게 되었다. 그때 형은 굳이 일을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니었고 농촌일의 어려움을 한번 체험하게 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김을 뜯어 돌아오는 배위에서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떨고 있는데 웃옷을 벗어 던져 주셨다. 당신은 노를 저으니 땀이 난다고-. 그때의 따뜻한 체온이 배인 옷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산비탈을 걸어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성년이 다 된 조카들과 어린 손자들이 앞서거니 뒷 서거니 했다. 애들 눈치 체일까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고 그대로 걸으니 자꾸 발이 헛 디뎌 졌다.

죽은 아내 옆에서 양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는 장자(莊子)얘기를 떠 올려 봤다. 그것을 읽으면서, 죽는다고 결코 울 일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애써 장자의 사상까지 기억해 내어 이를 악물어 보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나도 늙었기 때문이리라. 하나님! 내 형님 이 세상에 다시 오게 하실 때에는 고생 없는 곳에서 좋은 기(氣)를 받아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형님, 그때까지 부디 편안한 잠 드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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