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유비의 삼고초려
[다산로] 유비의 삼고초려
  • 강진신문
  • 승인 2019.12.0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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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권 _ 수필가

어느 날 유비(劉備, 161~223)에게 단복(單福)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저는 어릴 적부터 유명한 협객이 되려 했는데 사군께서 아랫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이 몸을 거두어 주십사 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람을 죽이고 도망 다니느라 이름을 서서(徐庶)로 개명을 했습니다."

유비는 그의 솔직하고 용맹스러움을 가상히 여겨 책사로 삼았다.

한편 위나라 조조 군사가 유비의 진지를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다. 서서는 성 바깥에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자기 군사의 군수품 일부를 불살라버리게 하였다. 그런 다음 부하들을 이끌고 남쪽을 향해 황급히 도망치는 척하자고 했다. 유비가 그의 계책대로 하자 조조 군사가 죽기 살기로 추격하다 매복하고 있던 유비의 군사에게 대패했다. 유비는 조조 군사에게 일격을 가하고 서서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어느 날 서서가 유비에게 말했다. "이 고장에 특출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 있습니다. 사군께서 한 번 만나보실 생각이 있으신지요?"유비는 특출한 재주를 가진 자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요."하고 묻자 서서가 "그의 성은 제갈(諸葛)이요, 이름은 량(亮)이라고 합니다.  그는 지금 깊은 산 속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데 사람들은 그를 와룡선생이라 부르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하루 속히 만나보게 해 주시오"라고 말하자 서서는 정중하게 말했다"그 사람은 쉽게 불러다가 만나실 분이 아닙니다. 그분을 얻고 싶다면 사군께서 몸소 찾아가셔야 합니다"

이튿날 관우와 장비를 앞장세워 제갈량 처소에 이르렀다. 흙으로 벽을 쌓은 허술한 집에 유비 일행이 들어서자 제갈량의 시중을 들고 있는 동자가 나왔다.

그에게 말하길 "나는 유비라고 하는데 제갈량 선생을 보러 왔네, 들어가 여쭈어다오" 하자 동자가 말했다. "선생님께서 오늘 아침에 나가셨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언제쯤 집으로 돌아오시는가?"하고 묻자 "나가시면 들어오시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사나흘이 될 때도 있고, 어떤 때에는 십여 일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비는 동자에게 "선생께서 돌아오시거든 유비가 다녀갔다고 전해다오" 말하고 돌아왔다. 

유비의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며칠 지나 또 관우, 장비와 함께 제갈량 집에 찾아가 동자에게 묻자 "선생님께서 집에 돌아와 며칠 계시다 또 나가셨습니다"하고 말했다. 유비는 며칠 후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다. 

유비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며칠 흐른 뒤 세 번째로 찾아 갔을 때는 마침 제갈량이 집에 있었다. 그는 유비가 두 번이나 다녀갔다는 말을 들었기에 방에서 뛰어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유비가 이렇게 제갈량을 얻기 위해 그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아간 일을 두고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이것은 사람을 얻기 위해 예를 갖추어 청함을 이르는 말이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선생님께서 이제 산에서 내려와 저를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

제갈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고 겸손하게 말했다. "장군께서 인정이 많으시다는 소문을 진즉 들었습니다. 만일 장군께서 저를 버리지만 않으신다면 견마(犬馬)의 수고를 다할까 합니다" 유비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207년 제갈량은 유비의 군사가 되었다.  제갈량은 천하를 셋으로 나누는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후 오나라 손권과 연합하여 적벽에서 위나라 조조를 대파하여 형주를 점거하며 그 역량을 점점 키워갔다. 유비가 지나치게 제갈량을 신뢰하자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었던 관우와 장비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자 유비가 "나에게 제갈량이 필요한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필요한 것과 같소. 두 번 다시 불평하지 않았으면 하오,"라며 양해를 구하자, 두 사람도 더는 불평하지 않았다. 아주 친밀하고 끈끈한 친구사이를 가리켜 물과 고기의 관계, 수어지교라 부르는 것은 이때 말했던 유비의 말에서 유래했다.  

유비는 멀지 않아 촉으로 들어갔고, 익주를 점거하여 익주목이 됐으며 한중을 점령하자 조조는 철수하며 "이미 농서를 얻고서 또 촉을 바랐구나."라고 후회했다. 유비는 221년 황제의 자리에 올라 성도를 도읍으로 정하여 국호를 한(漢), 연호를 장무(章武)라 했다.(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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