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의 한숨소리, 당신들은 듣는가!
들녘의 한숨소리, 당신들은 듣는가!
  • 문화부
  • 승인 2002.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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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농장 김용복회장
무섭게 몰아치던 태풍도 어느덧 모두 지나가고 부쩍 높아진 하늘과 아침저녁 서늘한 기온에 가을을 실감한다. 싱그러운 가을바람과 투명한 햇살을 받으며 들판의 곡식 영그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가을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물을 대고 김을 매며 비지땀을 흘린 농부는 들판의 곡식을 바라보기만 해도 저절로 배가 부르다는 수확의 계절, 그러나 올 가을은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은 즐겁지만은 않다. 아니 즐겁기는 커녕 한숨으로 가슴이 꽉 멘다.

지난 여름의 태풍은 그 어느 해보다 심각한 피해를 안겨 주었다. 도시 지역을 제외하면 전국 대부분의 시․군이 비상재해 지역으로 선포될 만큼 몇 차례 태풍은 전국 곳곳을 남김없이 훑고 지나갔다.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우리 영동농장만 해도 예년에 비해 30% 이상의 감산(減産)이 예상될 만큼 태풍의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낙동강이 범람하여 온 마을이 물에 떠내려 가버린 경상도 지역이나 태풍 “루사”에 집이며 가게며 생활 터전을 송두리째 날려 버리고 아직도 컨테이너 창고 속에서 피난 살림을 하고 있을 강원도 지역 주민들을 생각하면 30% 정도의 감산으로는 신음조차 내기가 미안할 지경이다.

어김없는 자연의 섭리대로 계절은 돌아오고 민족의 최대 명절인 추석도 지났다. 이제 본격적인 수확을 앞두고 있지만 어쩐지 마음은 겨울 들판처럼 황량하고 으스스한 한기마저 느껴진다. 줄어든 생산량이나 태풍에 날아가 버린 재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어려움이나 손해쯤이야 조금 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노력하면 오래지 않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온 국민이 수해이재민 돕기에 성금을 보태고 있고, 수해를 당한 지역 주민들도 그나마 가족이 무사한 것을 감사하며, 내 집의 피해도 크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앞장서고 있다는 소식도 간간이 들린다. 아무리 자연재해가 크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의 의지는 그것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런 소식에 든든한 희망을 가져 보다가도 연일 신문을 장식하는 정치권 소식만 보면 모든 희망이 순식간에 꺼지고 전신의 힘이 빠지는 박탈감에 사로잡힌다. 도대체 한국의 정치인들은 무슨 과거가 그리들 복잡한가? 선거 때마다 터져 나오는 ○○ 게이트니 몇 대 비리 의혹이니 하는 더럽고 역겨운 소리들이 올 가을도 예외 없이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오르내린다. ○○풍은 왜 그리도 많으며 ○○ 공작은 또 누가 누구를 위해서 꾸민 것들이란 말인가?

그것들이 모두 그들이 지난날 저지른 불법·부정한 행위를 표현하는 말이 아닌가? 7월, 8월 두 명의 총리 임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는 우리에게 또 얼마나 큰 절망감을 안겼는가? 외국 국적을 가진 자녀가 한국 의료보험의 혜택을 버젓이 받았는데도 부모는 법을 몰랐다고 시치미 떼고, 해외에서 유학중인 자녀에게 법이 정한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송금하고도 은행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고 발뺌이다.

부동산 투기 의혹에도 나는 몰랐다고 하고, 회사 돈을 개인이 유용해 쓰고도 갚았다고 우긴다. 정말 법을 모를 만한 무지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해도 제대로 믿기 어려운 판에 대학도 모자라 외국의 명문 대학에까지 가서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회 지도층 인사의 그 말을 누가 믿겠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공개된 석상에서 몰랐다느니 적법했다느니 온갖 억설을 늘어놓았다. 국회에서 두 번이나 총리 인준을 부결하는 바람에 아직 정식 총리를 임명하지 못하고 총리서리가 국정을 대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야의 국회의원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더구나 1인당 300만원의 조세 부담을 전제로 하는 내년도 예산안이 나왔는데, 지금의 국회를 보면 과연 국민을 위해 그만한 액수의 세금이 적당한지 꼼꼼하게 따져 줄 것 같지도 않다.

수많은 가장들을 거리로 내몰고 단란한 가정을 하루아침에 파괴했던 IMF의 악몽은 아직도 선연히 뇌리에 남아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른 시일 내에 IMF 위기를 극복했다지만 서민들은 언제 또 그런 사태가 닥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살얼음을 딛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 뿐인가? 국제 무역 환경 변화에 따라 우리의 주식으로 마지막까지 사수해야 할 쌀 시장마저 언제 개방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농부들의 심정엔 한여름 가뭄에 갈라지는 논바닥처럼 골 깊은 주름이 패이고 있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이런 국민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리당략과 자기 몫 챙기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형편이다.

두세 달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은 참신한 정책으로 국민들의 삶을 안정시킬 궁리는 하지 않고 그저 당대 당의 비리·약점 캐기에 여념이 없다.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통치자가 되고자 하는 후보에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도덕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에게 지난 날 어떤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이 과연 어떤 이유로 어떻게 일어난 일인지 추궁하고 경위를 가려서 용서할 만한 일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과정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선거에서 자기 당이 조금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술적 헐뜯기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기에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정치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며 정치가란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자리이거늘 지금 한국 정치인들의 머리 속에 국민이란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지 궁금하다. 아니, 그들의 의식 속에 과연 국민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저마다 정략 전쟁에서 자기 편할 대로 이용하는 ‘국민의 뜻’은 있을 지언정 진정한 국민의 소리는 이 땅에 발붙일 곳이 없는 한국의 정치 현실이 아닌가? 간절한 심정으로 바라노니, 한국의 정치인들이여. 어려운 현실을 어떻게든 극복해 보기 위해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땀 흘리는 서민들의 모습을 하루에 한번이라도 떠올려 보라. 태풍으로 쓰러진 벼를 어린 자식 껴안듯 조심조심 일으켜 세우느라 허리 휜 농민이 수확철의 들판에서 길게 몰아쉬는 한숨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언제나 큰 소리가 오가는 그곳 여의도의 둥근 집에서 여야가 서로 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기를 나는 기대한다.

그러나 정치인 당신들의 이해(利害)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국민을 좀 더 편안하게 하고 좀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는지를 다투는 국민 편에 선 투사의 모습을 나는 바란다.


2002년 초가을 농업인 김 용 복 (서울) 영동농장 회장 (재단법인) 용복장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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