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도로 눈을 감으시오
[다산로] 도로 눈을 감으시오
  • 강진신문
  • 승인 2019.11.04 08: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제권 _ 수필가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 선생은 당시 5대 문벌가 출신이었지만 벼슬길에 관심을 두지 않고 현실의 모순과 부폐에 대해 예리한 비평을 쏟아내는 선비였다. 그가 살던 18세기는 새로운 문물과 사상의 개편을 요구하는 실학파들이 고개를 들고 있었는데, 그 중에 박지원은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실학자로 황해도 금천의 첩첩산중 골짜기에서 풍찬노숙하며 돌밭을 일구고 살았다. 34세에 초시에 수석 합격한 뒤 벗들의 성화에 못 이겨 과거시험장에 갔다가 시험지를 일부러 제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을 다산 정약용과 단원 김홍도와 함께 조선 후기 문예부흥의 꽃이라고 불렀다.

그의 작품은 왜곡된 현실을 풍자한 글이 많다.

<호질>에서 그는 북곽이라는 위선에 가득한 학자를 풍자했다. 북곽 선생은 과부를 간통했는데 과부의 아들들이 그를 여우가 둔갑한 것이라고 해 여우를 잡아 돈이라도 벌자고 하자 황급히 도망치다 똥통에 빠졌다. 겨우 똥통에서 기어 나오니 호랑이가 도사리고 있었다. 애걸복걸 살려 달라고 하자 호랑이가 한참 꾸지람을 늘어놓다가 선비는 속이 썩었으므로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가버렸다.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으시오>에서 화담 서경덕 선생이 집을 잃고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나 이유를 물었다. 그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서 20년 넘게 장님으로 살다가 아침나절에 홀연히 눈이 떠져 만물이 밝게 보였다. 너무 기뻐서 사방을 돌아다니다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데 집을 찾을 수가 없어 울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화담 선생은 "도로 눈을 감으시오, 그러면 그대의 집이 있을 것이오."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눈을 감았는데, 곧장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색깔과 모양이 뒤죽박죽된 곳에 나의 감정이 덧붙여져 지금껏 익숙했던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적 지식이나 감각만으로 사물을 보려하지 말고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옛 것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되 그 바탕에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과 옛 것을 익히고 그것을 통해 새 것을 배우는 온고지신을 말해준다.

그의 글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비범하고, 당대의 교훈이면서도 현 시대의 교훈이기도 했다. 특히 다음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도둑이야기>에서 옛날 도둑 세 사람이 야음을 틈타 무덤을 파헤치고 금을 훔쳤다. 그리고는 셋 중 나이가 어린 도둑에게 술과 음식을 사오게 했다. 어린 도둑은 '이 금을 세 사람이 나누어 가지는 것보다 내가 몽땅 차지한다면 백 번 천 번 좋겠지.' 생각하며 술과 음식에 독을 넣어가지고 돌아왔다. 두 도둑은 '우리 둘이서 나누면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어린 도둑을 때려죽이고 묻어 버렸다. 그리고 그들도 독이 든 술과 음식을 먹고 죽고 말았다.

다음날 길을 가던 사람이 무덤가에 나뒹굴고 있는 금을 줍고는 횡재했다며 하늘에 감사드렸다. 그러나 그 또한 금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불행해질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왜곡과 위선으로 가득 찬 현실을 장님의 눈에 비유해 역설적으로 깨달음을 주며, 황금에 눈이 어두워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현대인에게 주는 교훈이다.

명작이 잠자고 있는 양심을 흔들어 깨워준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기 때문이다. 고전을 몇 세기가 지난 후에 읽어도 독자가 겪는 감동의 파장이 오래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전은 촌철살인과 같은 비유와 풍자로 독자를 울리고 웃기다가 살며시 교훈을 던져준다. 오랜 세월 생명력을 유지해 온 고전의 특징이고 매력이다. 나는 오늘도 양서와 고전으로 황폐한 마음의 밭을 갈고 희망의 씨를 뿌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