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39]
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39]
  • 강진신문
  • 승인 2019.10.27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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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 _ 한자·한문 지도사

합할 합(合)

合(합)자는 ‘합하다’, ‘모으다’, ‘맞다’, ‘만나다’, ‘그릇’을 뜻하는 글자다. 갑골문을 보면 뚜껑과 그릇을 그렸는데, 지금의 글꼴과 비슷하다. 수천 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말이다.

습득(拾得)의 拾(습)자는 재미있게도 수(扌)와 합(合)의 합체자(合體字)이다. 수(扌)는 손을 의미하니 손과 물건이 만난 셈이다. 여기에 ‘줍다’라는 뜻을 담았으니 절묘하지 않는가.

「사피엔스」 책은, 향후 생명의 법칙을 바꿀 수 있는 기술로 유전공학과 생명공학 그리고 사이보그공학을 말한다. 사이보그(cyborg)는 생체공학적 의수(義手)을 지닌 인간처럼 생물과 무생물을 결합(結合)한 존재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거의 모두가 이미 생체공학적 존재이다. 타고난 감각과 기능을 안경이나 보청기 그리고 컴퓨터와 스마트폰(뇌가 담당하는 정보 저장 및 처리의 일부 부담을 맡아준다)의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 책은, 인간은 지금 무기물적 속성과 일체가 되는 진정한 사이보그로 변신하는 경계선상에 서있다고 주장한다. 인지적이든 신체적이든 능력의 향상을 욕망하는 인간에게 합성인간은 매력이 아닐 수 없다.

 

함께 공(共)

‘말모이’란 영화를 보면서 共(공)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共(공)자는 ‘함께’, ‘같이’, ‘이바지하다’, ‘바치다’등의 뜻을 품은 글자이다. 갑골문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네모(口)모양의 그림과 그것을 받들고 있는 두 손을 그렸다. 갑골문에서 두 손은 어떤 대상을 받들고 높이는 정서적 의미를 내포한다. 尊(받들 존)자나 承(받들 승)자가 대표적인 글자이다.

‘말모이’는 우리말이 금지된 1940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이다. 말모이는 뜻은 두 가지다. 하나는, 순 우리말로 사전을 뜻한다. 또 하나는, 조선어학회가 사전을 만들기 위해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전국의 우리말을 모았던 비밀작전의 이름이다. 내가 이 영화에 감명(感銘)받은 이유는 ‘말모이’의 완성이 방방곡곡 어린 학생들로부터 글자를 모르는 무지한 백성, 지식인들에 이르기까지. 나이나 성별, 지식유무를 떠나 모든 이들의 간절한 소망과 정성이 함께한 공동작업(共同作業)이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걸음이 더 큰 걸음이라는 대사가 곧 共(공)자의 진정한 의미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영화/꽃 영(榮)

榮(영)자는 ‘영예(榮譽)’나 ‘영광(榮光)’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금문(金文:청동기에 주조되거나 새겨진 고대 은·주시대의 글자)을 보고 두 개의 횃불을 교차시켜 그렸다는 설도 있지만 꽃나무로 보는 설도 있다. 끝부분의 점들은 활짝 핀 꽃들의 상형이란다.

아마도 영(榮)자가 품고 있는 ‘꽃’의 뜻과 연결해서 나온 해석인 듯싶다. 아무튼 횃불은 고대로부터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어둠을 밝히는 단순한 도구였을 것이나 점차 종교적인 의식에 사용되면서 제사로서의 횃불, 상징으로서의 횃불로 변해갔다.

단지 사물에 불과했던 두 개의 횃불 속에 점차 繁榮(번영), 榮華(영화), 榮譽(영예)라는 추상적인 의미가 담겨지게 된 것은 인간의 의식 확장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만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동물이다. 인간은 어떤 자연물이나 인공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상상력을 타고났다. 예를 들면 ‘저 나무는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라고 여기는 그런 능력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미를 부여한 순간부터 인간의 정신은 그것에 구속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욕될 욕(辱)

辱(욕)자는 ‘욕되다’, ‘욕보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처음부터 그랬을까. 辱(욕)자는 辰(별 진, 때 신)자와 寸(마디 촌)자의 합체자이다. 辰(진)자는 농기구(큰 조개 껍데기)이고, 寸(촌)자는 손을 나타내니, 초기에는 ‘농기구를 들고 일하다’의 뜻으로 썼지 싶다. 고대글자인 갑골문도 이를 증명한다.

농업(農業)의 農(농)자에도 辰(진)자가 들어간 것을 보면 이 또한 우연한 조합은 아닌 것 같다. 수천 년 전 농기구로 시작했던 辰(진)자는 ‘때’와 ‘별’, ‘용’이라는 뜻을 담는 문자로 변신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버리고 시간의 개념을 품었다. 용은 무엇인가. 동양문화에서는 구름과 비를 다스리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辰(진 또는 신)자가 유구한 세월동안 많은 뜻을 새롭게 담기는 했으나 여전히 농사(農事)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욕(辱)자는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이 글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고 풍부하다. 농기구와 손으로 시작된 글자가 어찌하여 ‘욕’이라는 오명(汚名)을 뒤집어쓰게 되었을까. 하나의 이야기는 이렇다. 농사에서 중요한 것은 ‘때’이다. ‘때’가 되었는데 빈둥거리면 돌아온 것은 무엇이겠는가?  

 

혀 설(舌)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를 읽고 舌(혀 설)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설(舌)자의 갑골문은 입과 혀를 그려 만들었다. 말 할 때 튀기는 침까지 그려놓았다. 이 그림문자는 두 갈래로 갈라진 혀끝 때문에 무수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이야기가 생산되었다.

파충류의 혀를 그렸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문자를 인간의 생각과 정서를 담은 그릇으로 보는 학자들은 분명 그렇게 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 그렸을까? ‘일구이언(一口二言), 한입 가지고 두말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경계하고자 함이었을까. ‘두말’은 무책임한 말, 앞뒤가 다른 말, 뒷담화 등일 것이다. 나는 사피엔스에서 뒷담화에 대한 재미있는 관점을 발견했다. 이 책은 일단 뒷담화를 인간의 악의적인 능력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그런 뒷담화가 소규모 집단사회에서 순기능을 한다는 관점은 뒷담화는 무조건 나쁘다는 고정관념을 흔든다. 무슨 뜻일까? ‘누구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보는 인간관계의 색깔을 결정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네비게이션이 떠올랐다. 복잡한 길, 위험 한 길, 낯선 길을 가는데 네비게이션이 있으면 얼마나 수월한가.
 

어긋날 간(艮)

艮(간)자는 ‘어긋나다’나 ‘그치다’, ‘머물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물론 주역에서 괘(卦)의 이름이기도 한다. 艮(간)자의 고대글자를 보면 눈과 사람을 그렸다. 그런데 앞에 있어야할 눈을 등 뒤에 배치했다. 눈을 크게 뜨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눈이 커졌다는 것은 관심을 둘만한 무언가가 뒤에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게슈탈트 심리치료」란 책을 읽다가 ‘미해결 과제’가 우리민족의 정서인 한(恨)이라는 개념과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恨)에는 어떤 사람에 대한 해결되지 않는 미움과 적개심인 원한(怨恨). 이제 더 이상 해결할 수 없게 된 일을 뉘우치고 한탄하는 회한(悔恨),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하여 남아있는 구한(舊恨) 등 공통점은 모두 해결되지 못한 과제이다.

恨(한)자를 풀이하면 ‘뒤를 돌아보는(艮) 마음(忄)’이다. 현재를 살지만 마음은 늘 과거에 얽매어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한(恨)을 쌓아두지만 않고 적극적으로 풀려고 노력했다. ‘화풀이’, ‘분풀이’, ‘살풀이’, ‘한풀이’란 말이 이를 입증한다. 심리적으로 보면 미해결과제를 완결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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