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중세 한·중·일 도자 요장의 구조와 생산체계를 밝히다
[특집] 중세 한·중·일 도자 요장의 구조와 생산체계를 밝히다
  • 김철 기자
  • 승인 2019.10.13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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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심포지엄] 원료 채취장, 작업장 시설, 가마, 건물지 등도 매우 중요
제47회 강진청자축제 기간 중인 지난 7일 오후 1시 30분부터 박물관 시청각실에서 국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오후 5시 30분까지 4시간 동안 한국, 중국, 일본 각국의 중세시대 도자기 생산 시스템의 특징과 나라별 차이점 등에 대한 주제발표와 열띤 토론이 진행됐다.

 


 

당송대 월요 요장의 구조와 생산 체계
황쏭쏭 자계시박물관

당대 말기에는 월요의 생산 조직 구조가 변화하여, 원래 기물을 성형하고 소조하였던 일제화의 생산 조직 구조가 와해되기 시작하였고, 분업이 더욱 세분화 되었다. 이에 점차 전문적으로 자기를 성형하는 작업과정과 번조를 담당하는 작업장이 생겨나고 이를 각각 배호와 요호의 명칭으로 구분한다. 자토 채취와 가공, 자기를 성형 후 번조하고 나아가 자리를 파는 운송에 이르기까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고리가 서로 맞물리는 산업 사슬을 형성하였다. 산업 사슬의 형상은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각각의 고리를 더욱 전문적이고 세밀하게 함으로써 월요의 높은 기술과 예술적 성취를 이룩하였다. 절강중림고도자박물관에는 '寄燒坊'의 명문이 새겨진 반(盤) 파편 한 점이 소장되어 있는데, 유색이나 조형, 그리고 각획(刻劃)된 장식이나 번조 공예로 미루어 보아 이 반의 연대는 오대 말기부터 북송 초기에 속한다. '寄燒坊'은 분명 번조를 전문적으로 하는 '요호'로 여겨지며, 이는 북송 시대에도 당대의 '배호'와 '요호'가 분업 및 합작의 생산 경영 모델이 지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017년에 후사오 가마터 중 64호 당대 가마에서 자기질의 갑발이 한 점 출토되었고, 상면에 '라호사비색완'의 6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자기 질의 갑발이 비색자기를 번조하는데 사용된 요도구임을 재차 입중 하는 것 뿐 아니라, 상림호가 비색 자기의 원산지임을 더욱 분명히 한다. 아울러 비색자기를 제작하는 장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호사'의 신분을 따져볼 만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과거 상림호의 모든 가마터에서 채집과 고고학적 발굴 과정 중, 끝에 '師'가 붙는 인물의 예는 오직 황성산 당대 가마터에서 출토된 '羅業師記'명분 뿐으로 역시 자기 재질의 뚜껑이며 비색자기나 기타 고품질의 청자를 번조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기타 자기 재질이나 모래가 섞인 내화토 재질의 요도구에도 도공의 정보가 새겨져 있는데, 가령 성씨나 성명, 혹은 성씨나 성명 뒤에 '行', '行號', '記', '記燒'글자가 붙어 있다. 따라서 상림호 요장의 모든 도공들도 현재의 직함과 유사한 차이가 존재하였는지 생각해 볼 수 있으며, '師'는 아마도 당대 수공업 중 높은 직함에 속하는 명칭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당시의 요업에 직함의 등급 차이가 있었는지, 그리고 각 등급별 직함을 가진 도공 간 분업과 협력 방식이 어떠했는지에 대하여, 고고학 자료의 추가 발굴과 당나라 수공업 제도에 대한 심층 연구가 필요하다.

월요는 동한 말에 처음 자기를 구워낸 이래,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은 물론 세계 도자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의 많은 가마에 영향을 미쳤거나, 심지어 한반도 고려청자의흥기와 발전도 월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송시기는 월요 발전의 절정기였고, 상림호는 당시 월요의 핵심 산지로서 기술적 수단과 예술적 표현 형식 외에 요장의 분포와 생산 체계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더욱 깊게 연구할 가치가 있다.

고려청자 요장의 구조와 특징
권혁주 민죽문화유산연구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청자 요장의 생산체계에 있어 가장 큰 특징은 기와 건물지가 요장 내에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조사 현황을 고려하였을 때 이 기와 건물지는 고려청자가 출현한 어느 시점에 등장하였고 전축요 또는 전축요계 토축요의 성격을 띠는 초기 청자 요장에서는 대부분 확인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고려 중기 이후에는 청자 생산을 주도한 강진과 부안에서만 기와건물지가 확인되어 고려 초기와 고려 중기 강진과 부안의 청자 생산체계가 유사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지의 성격은 평기와와 명문와의 내용, 사당리 23호와 40호, 부안 유천리 3구역 건물지 주변으로 확인되는 자편퇴적층의 양상과 성격을 고려하였을 때, 지방행정단위의 所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고려 왕실 또는 당시 유력한 지배층과 연관된 宮司의 '監造 施設'로 의견을 개진하고자 한다.

물론 기본적인 요장의 운영이 국가에 貢納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던 '所'의 생산 시스템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건물지를 조성하고 이를 운영한 주체를 말단 행정단위의 '所'로 보는 것은 제고의 여지가 있다.
공방지는 고려 초기와 중기가 그 구조와 조성방법이 매우 다른 것으로 확인된다. 고려 초기는 배천 원산리, 고창 용계리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전축요 축조 기술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고려 중기는 강진 유형을 수용한 여주 부평리, 여주 안금리, 용인 보정리 등 대부분의 요장에서 방사형으로 여러 줄의 고래가 있는 온돌이 확인되며, 이 외 다른 시설이 확인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강진과 부안에선 공방지가 조사되지 않았지만, 강진 사당리 23호의 도기호 매납양상, 부안 유천리 3구역 건물지 조사 양상을 고려하였을 때 동 시기 강진 유형을 수용한 청자 요장과는 다른 구조의 공방지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고려청자 요장의 구조와 생산체제, 전개 과정을 파악함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곳은 강진 사당리요장이다.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사당리 7호, 8호, 10호, 23호, 40호 등의 요장에서는 시굴조사결과 석렬, 와적층, 자편퇴적층, 점토층, 소성유구 등 본 발표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본 기와 건물지와 공방지 관련 유구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들 요장의 운영시기가 고려초기-후기까지 연속된다는 것이며, 특정 요장에 제한되지 않고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확인된다는 것이다.
비록 근·현대에 조성되었던 민가 관련 시설과 중첩된 경우도 확인되고 있어 잔존 상황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추후 정치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성공적으로 이들 기와 건물지와 공방지 등 요업 시설 구조와 현상이 드러난다면 고려청자 요장의 생산체제의 실상에 보다 더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일본 중세 세토 요장 연구 현황
타시로 유이치로 도쿄대학

전기(12세기 말 ~13세기 후반)는 사이호(四耳壺), 병, 주전자와 같은 항아리, 병류가 중심적으로 생산된다. 문양에 관해서는 인화(印花)와 빗살 기법으로 시문한 문양이 일부 제품에서 확인된다. 이 시기 제품의 대부분은 막부(幕府)가 위치한 가마쿠라(鎌倉)에 운반되는 '고급 시유도기'의 성격을 지닌 것들 이었다. 중기(13세기 말~14세기 중반)는 처음에는 사이호와 같은 대형 제품이 중심적으로 생산되었지만, 전기와 달리 흑갈색으로 발색하는 철유(鐵釉)제품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철유는 새로 생산되기 시작하는 덴모쿠(天目) 다완을 비롯해 전기부터 주된 기종으로 생산된 사이호나 병에도 씌워졌다. 또한, 전체적으로 생산량이 늘어나고, 그릇 표면에 장식된 문양도 주걱이나 정을 사용해 문양을 그리는 획화(劃花)기법이나 형틀로 모양을 만든 점토를 그릇 표면에 붙이는 첩화(貼花)기법도 등장한다. 항아리, 병이 주요하게 생산되었던 전기 및 중기와 달리, 후기(14세기 후반~15세기 후반)에는 완, 접시, 발을 비롯해 냄비, 절구와 같은 생활 용품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시유도기(고세토)가마에서 확인되는 요업제조시설과 방형탄류유구는 공방지라는 개념과도 좀 더 다른 독립된 기능을 가진 시설로 주목된다. 또한 일괄적으로 공방지로 간주하는 유구도 자세히 관찰하면, 그 지역의 독특한 요업 문화가 담겨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본 발표는 공방지를 주제로 한 것이기에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으나, 고세토는 고려청자와 관계가 깊은 것이다. 13세기에 들어서 활발하게 제작된 매병, 13~14세기 전반에 보이는 모란 무늬는 당시 고려청자가 중국도자와 함께 가라모노(唐物)로서 일본에 수입된 양상을 대변한다. 이러한 도자들이 수입도자의 대체품으로서 높은 위치를 점하게 된 고세토의 조형에 자극을 준 셈이다. 일본이 청자를 제작하기 시작하는 것은 17세기 이후지만, '자기','도기'의 개념을 넘어서 고려청자의 비교대상으로 고세토는 앞으로 주목할 만한 존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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