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강렬한 색채로 강진을 노래하다
[특집] 강렬한 색채로 강진을 노래하다
  • 김철 기자
  • 승인 2019.10.13 21: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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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윤재우 화백 기증작품전...오는30일까지 강진아트홀 1층 전시실

 

지난 2005년 작고한 강진 최초의 서양화가 윤재우 화백의 작품세계를 살필 수 있는 '고(故) 윤재우 화백 기증작품전'이 개막했다. 지난 5일 아트홀 1층 전시실에서는 이승옥 군수 등 기관단체장과 유족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증작품전 개막식을 가졌다. 이날 개막식에는 고 윤재우 화백의 흉상 제막식도 함께 열렸다.

강렬한 색채가 돋보이는 이번 전시회는 1층 2곳에 전시실에 나눠 정물화, 인물화 등을 선보이고 있다. 오는 30일까지 개최되는 이번 작품전은 지난 6월 강진군이 고(故) 윤재우 화백의 부인인 박용지 여사 등 유가족에게 기증받은 유화작품 123점을 토대로 특별히 마련한 전시회이다.
윤재우 화백은 1917년 강진 유자마을(귤동)에서 해남윤씨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13대 손으로 태어났다. 윤선도의 고조부는 윤효정(尹孝貞,1476~1543)은 본래 강진 사람으로 윤 화백의 고향 유자마을에서 살다가 해남으로 장가들어 해남윤씨를 일으켰다.

그 후손이 해남 녹우당에서 세거해오고 있다. 윤선도는 소현세자와 효종의 어린시절 스승으로 '오우가'로 유명한 선비 예술인이다. 그의 증손자 윤두서(尹斗緖, 1668~1715)는 국보 제 240호의 수염난 자화상으로 유명한 선비화가이고, 그의 아들 윤덕희와 손자 윤용 또한 그림을 잘 그린 문인화가였다. 또한 그의 외증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801년 강진으로 유배된 뒤 1808년 외가에서 마련해준, 어머니(윤소온)의 10대조 (윤효정)가 태어나고 자랐던 귤동의 초당에서 11년간 살았다. 그는 이곳 다산초당에서 학문연구와 함께 후학을 양성하면서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등 500여 권의 저술을 통해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으며 '매조도'두 폭을 그려 두 딸에게 선물한 부성애를 남겼다.

윤재우 화백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  도암 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에 다닐 때 김인배 교장이 그의 그림솜씨를 보고 그의 그림을 학교 대표로 경성농산물공진회에 출품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4세 때인 1930년 도암 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림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낮에는 안경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부 고등속학교를 다니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태동 초상화학교를 수료한 뒤 오사카(大版)미술학교에 입학해 본과 3년과 전공과 2년을 마쳤다. 이때 훗날 월북한 화가 정종여(1914~1984)와 호남대학교
교수 및 총장을 지낸 양인옥(1926~1999) 등과 함께 수학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철공소에서 일하거나 신문을 배달하여 돈을 벌며 학업에 전념했다.
윤 화백은 1946년 일제잔재 청산과 새로운 미술 수립을 위해 결성한 조선예술 동맹 회화부 회원으로 정종여와 함께 활동했다. 당시 윤 화백이 존경한 스승은 프랑스에서 미술유학을 했던 사이토 요리(1885~1959)였다. 사이토는 오사카 미술학교 창설에 참여하고 일본에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고갱과 세잔을 소개한 일본 근대 서양화의 선구자다.

윤 화백은 스승 사이토처럼 고흐와 세잔을 좋아했으며, 실제로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그만의 회화세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윤재후 화백은 1944년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목포 문태중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며, 1945년 일제 강점에서 해방된 뒤 1946년부터 광주에서 광주 사범학교(~1949) 및 조선대학교(1949~1950)교수를 지냈다. 6.25전쟁이 끝난 1953년 조선대를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가 서울고·수도여고 교사, 선린중·서울여고교감, 서울시 교육위원회장학사, 봉천중 교장 등을 지냈다. 이때 윤 화백은 퇴근 후에 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런 까닭에 그는 '밤의 화가'라 불리기도 했다. 특히 윤 화백은 1953년부터 1970년까지 당대 최고의 미술공모전인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서 특선 4회, 입선 17회를 수상해 화명(花名)을 날렸다. 또한 1958년 '근대회화사-유파와 작가와 작품'과 문교부 검정 중고교 미술교과서(정음사, 동아출판사)를 펴내 서양 현대미술을 소개한 저술가로도 알려졌다.

윤재우 화백은 1982년 교직에서 정년퇴임한 뒤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창작에 몰두했다. 오로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이용해 야외로 나가 자연 풍경과 농어촌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가까이는 서울의 도봉산이나 북한산, 경기도의 강화나 한탄강은 물론 강원도 설악산이나 축령산, 전라도 여수, 경상도 울산 등지에 이르기까지 광폭으로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풍경화를 다수 제작했다.  

■ 작품세계

이번에 강진에 기증된 윤재우 화백의 유작은 정물화 45점, 인물화 22점, 풍경화 56점 등 모두 123점이다.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유화들로서 색상이 강하고, 세부와 명암이 생략된 화려하고도 사실적인 구상회화다. 대상을 꼼꼼하게 묘사하기보다 굵직한 붓터치로 내면세계를 표현한 특징을 보인다.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풍경화와 옷입은 인물화(코스튬)는 꽃이나 과일을 그린 정물화나 옷벗은 누드화보다 풍부한 명암과 원근을 갖춰 사실적인 형상을 보인다. 또한 풍경화는 후기 인상주의 회화, 정물화와 인물화는 야수주의 회화에 각각 가깝게 표현되어있다. 이러한 이중구조의 회화가 윤 화백의 생애 전반에 걸친 작품들의 특징을 이룬다.

후기 인상주의는 원시적 소재와 강력한 색채 사용이 특징인데, 고흐, 고갱, 세잔이 대표적인 화가다. 야수주의는 후기 인상주의 영향으로 시작되어 어둡고 두꺼운 윤곽선에 의한 형태의 단순화, 빨강과 녹색의 지배적 사용, 두드러짐 없는 명암도 없는 평평한 색조를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마티스와 브라크가 야수주의 회화를 대표한다. 이러한 20세기 현대미술 양식이 윤재우 화백의 그림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두꺼운 윤곽선, 강한 색채, 빨강과 초록의 대비, 평면적 화면 구성에서 그 특징을 볼 수 있다.

윤재우 화백의 그림은 모두 우리의 모습과 한반도의 자연 풍경을 오롯이 담아냈다. 그런 까닭에 윤 화백의 그림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고 친근하다. 또한 간략하게 표현한 대상에서 직접적 이해가 아닌 여유로운 사색적 공감을 얻게 된다. 이것에 윤 화백의 작품이 갖는 미학적 가치이고 존재의 의미다.
미술평론가 김인환은 '윤재우 선생은 자연의 대상적 세계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을 표현적으로 전이시키는 그대로의 독자적 세계를 개척해 왔다.

풍경화이건 정물화이건 인물화이건 소재 대상에 관계없이 그의 작품 속에 배열된 자연물은 등가의 화면가치로 요소적 측면을 드러낸다. 풍경의 원근을 강조하거나 인물의 볼륨 혹은 명암효과를 특별히 가감하기보다 활력적 터치와 다소 평면화로 치우치는 율동적 다색성을 구사하여 한결 명쾌하고 구상적 화면을 만들어간다. 또 거기에는 생략과 통합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장식적 감미로움이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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