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게, 간절하게 대한독립을 외쳤다"
"간절하게, 간절하게 대한독립을 외쳤다"
  • 김철 기자
  • 승인 2019.09.02 1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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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포커스] 광복절 맞아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강진읍 출신 고 김현균 선생

 

강진읍 출신...독립운동 준비중 일본경찰에 체포

지난 28일 서울 강남구 안창호기념관에서 지역출신 고 김현균 선생이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문중 종친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4.4 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포상을 받게 됐다.

고 김 선생은 지난 1900년 3월 29일 강진면 서문리 6호에서 출생했다. 김 선생은 1919년 3·1운동 거사가 이루어지자 같은 해 3.23 독립운동을 하기로 동지들과 규합하고 자신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주도적으로 강진지역 일제저항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했듯이 김 선생은 위균이라는 자신의 본명이 밝혀질 경우 함께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동지의 조직이 발각되거나 가족들에게 불측의 피해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일본경찰에게는 아명인 김현균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강진군향토지에 따르면 강진 4·4 독립만세 운동은 3·1운동을 전남지역으로 확산시킨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강진 4·4독립만세운동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 20일 1차 거사 실패 이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동지들을 규합해 4월 4일 강진 장날(5일장)에 수 천명의 군중이 일제히 궐기한 날로 전남 지역 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다.

4월 4일의 아침은 강진평야가 안개에 쌓였고 폭풍을 예시하는 바다와도 같이 강진 성내는 정적에 묻혀있었고 정오 12시 북산위에 대형 태극기가 나부끼자 이를 신호로 보통학교 생도들이 교실창문을 박차고 운동장으로 뛰쳐 나오고 시장에서는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듯 지축을 흔들었다.

일본경찰은 당황한 듯 전원을 동원하여 방지에 임하였으나 5천여명의 흥분한 대중을 수십명에 불과한 경찰력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었고 학생과 합류한 대중의 행렬이 경찰서를 향하여 전진하던 때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의 출동부대와 대치했다. 그 뒤를 이어 장흥에 주둔한 헌병이 가세하여 발포하면서 진압하니 일반대중은 해산되고 주모자로 지목된 인물들은 체포되었다.

당시 휘문의숙에 다니던 김현균은 3·1운동으로 학교가 휴학하자 독립선언문 등을 품속에 감추고 낙향해 김윤식, 이기성, 김안식, 김현봉 등과 모임을 갖고 3월 23일을 거사날짜로 추진했다.

그러나 거사를 치르기 사흘 전인 3월20일 일본 순사들에게 발각돼 12명이 체포돼 '1차 만세운동'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강진 지역 선각자들은 앞서 수립한 계획에 따라 포기하지 않고 다시 '2차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강진 장날인 4월4일 정오에 시장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당시 서울유학생으로 이들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오승남을 비롯하여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의사들은 독립유공자로 기려지고 있다.

김현균은 지역에서 가장 대한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현균 선생의 뜻을 기리야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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