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후손들이 다신계를 이어간다
강진의 후손들이 다신계를 이어간다
  • 강진신문
  • 승인 2019.08.26 15: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희준 교수의 다산정차를 말하다(4)]

 

백운옥판차, 강진다산명차.... 강진에서 전국으로 알려야

- <다신계>의 무형 유산의 후예
<다신계>의 제다법이었던 구증구포 또는 삼증삼쇄의 떡차는 백련사의 만불차와 용단차란 이름으로만 남았고, <다신계>의 잎차는 이한영의 '백운옥판차'라는 상표와 이에이리가 기록한 간략한 제다방법만 남아있다.

그렇지만 이한영이 1940년대까지 강진읍내에 차를 팔러 다닌 기록이 함께 전하고 있어, 적어도 일제강점기까지는 강진의 차산업이 일어났던 흔적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금당 최규용이 '백운옥판차'를 찾아왔을 때, 백운동에서 이관묵씨는 백운옥판차를 백운동에서 찻잎을 땄고 옥판선지로 포장한 떡차라고 소개하여 차계가 혼란에 빠진적이 있다.

'백운옥판차'는 잎차이다. 이것 보다 더 놀라운 일이 다산의 <동다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던 차인들에게, 이덕리의 <동다기>가 발견된 일은 우리 차 문화사를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새로운 자료에 늘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두 강진에서 벌어진 일이다. 강진이 그만큼 우리 차 문화사에서 핵심 코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강진에서 생산된 차는 1950년대 이전은 금릉월산차, 백운옥판차, 금릉다산향 등이고, 1960년대 이후에는 야생죽로차, 보은차, 만덕산 일심차, 다산 야생차 등이 있었다. 1980년에 지금의 오설록의 전신인 주)태평양화학이 강진군 성전에 '강진다원'을 개발하면서부터 강진의 차산업이 현대화에 시동을 걸었으나, 태평양화학의 차산업 중심이 제주로 옮겨 가면서 그 기회를 잃고 말았다.

2007년에 차생산조합인 만경다설(萬景茶)이 생기면서 설아(芽), 자하(紫霞), 반야병다(般若餠茶) 등이 만들어져 잎차와 떡차의 전통을 이어가는 새로운 강진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2016년부터 강진야생차품평대회 수상자들이 모여서 통합 브랜드로 '강진다산명차(대표 장금애)'를 출시하면서, 국내에서 유일한 차관련 통합브랜드를 가진 지자체가 되었다.

특히 여러해 전부터 힘을 기울여 온 다산의 삼증삼쇄 떡차를 만드는 노력을 하여 가까운 시일에 출시할 예정이다. 특히 2007년부터 이어온 강진야생수제차품평대회는 강진차산업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좋은 무대인데, 매번 70-80점이 넘는 출품수를 자랑하고 있고, 출품자들의 차가 외부에 나가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어 강진차산업의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다.

<다신계>에 한 뿌리를 두고 있는 강진군 성전면 백운동 또한 2007년부터 시작된 이한영에 대한 재조명으로, 이한영가의 복원을 통해 강진차산업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백운옥판차'가 현대적 차산업의 출발점이라는 성급한 결론으로 그보다 앞서 있었던 '금릉월산차'의 존재 가치를 흐리고 있다.

물론 이한영은 금릉월산차도 만들었고, 백운옥판차도 만들었다. 백운옥판차 보다 먼저 상품화 된 것은 '금릉월산차'이다. 일본의 아유카이 후사노신이 보았던 '금릉월산차'의 포장에 대한 기술이 전하여 오고 있는데, '백운옥판차'를 최초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상업주의적 태도이다. 보다 학술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로 <다신계> 제다법의 잎차 부분, 또는 조선시대와 현대를 관통하는 강론의 중심 속에서 '백운옥판차'가 자리매김하여야 한다.

백운동에는 이시헌의 후손인 이승현(李承鉉) 씨. 이한영의 생가는 그의 증손자인 이효명(李孝明) 씨가 지키고 있다. 둘 다 원주(原州) 이씨 가문이고, 인근에 사는 한 집안 사람들이다. 이효명 씨가 최근 공개한 '월산차' 상표를 찍는 도장도, 이효천 씨가 보관하던 것을 이효명 씨에게 건네줌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도장은 나무 도장이 아니라 고무도장이다. 그리고 상표 또한 '금릉월산차'가 아닌 그냥 '월산차'란 점도 보다 심도 깊게 검토를 하여야 근대차산업의 태동시점과 함께 우리차산업의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강진차의 미래
우리가 차 문화와 차산업을 연구하면서도 깊게 빠지는 함정이 있다. 바로 지금의 시각으로 예전의 문화를 보려고 하는 점이다. 또한 자신이 알고 있거나 행하고 있는 것을 정당화시키려는 아전인수격인 주장들이 난무한다.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검증하고 고쳐나가야 한다.

<다신계>는 신분과 종교를 초월한 차를 중심으로한 차생산문화공동체이다. 차생산의 노동에 있어서도 평등성이 주어졌고 계원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협동조합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다신계>의 차 문화를 알아보기 위해, 다산초당과 그 주변에서 찻잎을 채취할 수 있는 환경을 살펴보았다. 귤동, 석름봉 그리고 석문과 덕룡산이, 다산초당이 있는 귤동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다신계>에서 만든 차는 잎차와 떡차가 있다. 잎차는 다산이 만드는 방법을 간략하게 서술하여 그것이 어떤 차인지 규명하기 쉽지 않지만, 오늘날의 녹차와 백차의 그 중간에 있는 차일 것으로 생각된다. <다신계>의 계원은 아니지만 다산의 강진 마지막제자라는 이시헌은 차의 포장에서 '갑(匣)'이란 개념을 넣었는데, 이것은 금릉월산차와 백운옥판차로 이어지는 잎차의 전통이 되었다.

<다신계>의 떡차는 다산이 창안한 구증구포 또는 삼증삼쇄의 방법으로 만드는 차인데, 가루를 내어 성형을 하기 때문에 단차 또는 용단차라고도 한다. 이 제다방법은 이시헌에게 전승된 확실한 기록이 있고, 많은 기록들이 초의선사와 만덕산 백련사와 강진 보림사에 전승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초의선사가 중심에 있고 그 제다법은 대흥사의 비구니 그리고 이학치 등으로 전승 되었다. 그러나 이학치와 같은 시기에 대흥사에 있었던 응송 박영희는 전혀 다른 단차제다법을 증언한다.

다산에게서 직접 제다법을 전수받은 기록이 나오는 이시헌의 후손들은 이한영에 이르기 까지, 떡차보다 잎차의 생산에 더 많은 힘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전승과정에서 '금릉월산차'라고 하는 '백운옥판차'보다 앞선 차가 있음에도 '백운옥판차'를 우리나라 최초의 상표라고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 차 문화의 역사를 스스로 폄하하는결과를 초래한다.

이덕리가 지은 <동다기>도 한동안 다산의 저술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다산의 저술이 아닌 것이 판단된 지금 다산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졌다. 오히려 다산이 차 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져서 차 문화 중흥조라고 까지 칭하게 되었다. 진실의 힘만큼 강한 것이 없다. 그러나 만들어지고 부풀려지는 것은 오히려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아니라 욕되고 한다. 본 연구자는 다산을 차산업 중흥조로 보고, 초의선사를 차 문화 중흥조로 보는 것이 오히려 우리 차 문화산업에 좋은 지향점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신계>의 전승은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먼저 <다신계>의 약조 가운데 하나인 차가 다산에게 보내어지는 것이 언제까지 실천되었으며 이 약조가 지켜지는 가운데 형성된 <다신계>의 정신문화적 가치성을 살펴보았고, 그리고 <다신계>의 제다법의 전승과정에서 우리 전통 제다문화의 무형적 가치를 알아보았다.

<다신계>는 다산이 해배되어 두릉으로 가고난 뒤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여, 다산이 죽기 얼마전 다산 스스로 <다신계>가 아니라 무신계라고 할 정도로 쇠락하였다. 그러나 이 <다신계>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은 월출산 백운동의 이시헌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사실을 범해는 <다가>에서 "믿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막았다."라고 표현하였다.

이 <다가>는 만덕산과 덕룡산에서 생산된 용단차는 오히려 사귐이 활발한 것을 끊었다는 표현을 하여, 사방에서 만덕산에 요구하는 차가 많아지자 그것에 다 대응할 수 없었던 승려들의 곤란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어, 강진에서 <다신계>가 지속되는 차 문화를 함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다신계>의 문화적 전승의 후예는 윤재찬과 그 뒤를 이은 양광식, 그리고 강진지역의 차인들이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다신계>의 차 문화 전통을 1930년 때까지 지켜온 사람도 1950년대 되살림하여 1970년대 우리에게 드러내고, 오늘날까지 다산의 차향기와 차정신을 전하여준 것은 강진의 귤동에 살았던 낙천 윤재찬이었다.

<다신계>의 정신을 전하는 마지막 제자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공개되는 <귤림문원>에 나오는 기록들은, 다산의 학문적 기초가 초서와 필사에 있다는 것을 그대로 따르며 실천하며 다산을 지켜온 윤재찬을 새롭게 보게 한다. 윤재찬의 학문적 전통을 따르고 있는 양광식은 현장을 답사하면서 직접 기록에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고 있고, 다산의 제자, 다산학단의 저술과 그 유적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고 있어 이 시대의 살아있는 <다신계>의 계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신계>가 신뢰를 바탕으로 계를 만들었듯이, 강진의 차인들은 강진다인연합회를 만들어 강진 차 문화 산업을 이끌어 갈 방안을 함께 협의할 단체를 만들었다.

또한 <다신계>가 차를 공동 생산하던 그 전통에 따라 '강진다산명차'라는 지역통일 브랜드를 만들었다. 이렇게 볼 때 <다신계>의 정신을 이어가는 문화사적 전승은 강진 지역의 모든 차인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