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후예들 다신계를 이어가다
다산 후예들 다신계를 이어가다
  • 강진신문
  • 승인 2019.07.2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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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준 교수의 다산정차를 말하다 2]

 

삼증삼쇄 떡차 그대로 복원

■ 제다 과정
▣  보관
차의 보관은 예부터 중요시 되어 왔다. 차인들이 차생활의 실체를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말이 "만들 때 정성을 다하고 보관할 때 건조하게 하고 그리고 우릴 때 청결하게 한다. 이 정성과 건조 그리고 청결함을 다하면 차의 도리를 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造時精 藏時燥 泡時潔, 精燥潔 茶道盡矣)"이다. 보관용기가 발전하지 않았던 예전의 차생활에 있어, 차를 보관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다산은 차를 보관할 때 차주머니(茶囊)에 싸서 보관하였다.


"좁은 집이라 차주머니가 기거에 거추장스러워 괴롭기 짝이 없을 테니 감히 받들어 드리지 않습니다. 속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이를 미루어 보아 다산의 영향을 받은 <다신계>의 계원들도 차를 보관할 때는 주로 차주머니에 담아서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 차주머니를 마치 옛날의 한약방이나 사랑방처럼 천정에 매달아 놓아서, 앉고 일어설 때 불편함을 주기에, 다산은 차를 보내지 않는 것을 일부러 빙 둘러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주머니에 차를 담는 방법은 자하 신위가 박영보를 통해 초의선사의 차를 맛본 뒤 지은 <남다시병서(南茶詩竝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절집에 곡우비가 흩날리는 시절에
새 떡차 찌고 말려 붉은 비단에 넣었네
즉 초의선사는 곡우때 찌고 말린 떡차를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는 붉은 비단주머니에 넣었다. 차를 바로 넣지 않고 한지에 싸서 넣었는데, 그때 나름대로 차의 이름을 적었다. 그 이름은 녹설아(綠雪芽)였다.

여기서 우리는 작설차라는 우리차의 대명사가 만드는 사람의 심성에 따라 새로운 이름이 부쳐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떡차를 한지에 곱게 싸고, 그 위에 차의 이름을 적은 다음, 다시 붉은 비단 주머니에 싼 정성이 가득 담긴 차포장을 만나게 된다. 이에 반해 다산의 차포장은 다소 검소하고 실용적이었을 것인데, 한지에 싸서 무명 주머니에 담는 그런 소박한 형태의 포장을 추측해본다.

■ <다신계>의 음다법
<다신계>의 차는 잎차와 떡차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떡차가 주를 이룬다. 1818년 다산이 해배되기 전 대흥사와 백련사의 스님들과 함께 지은 <육로산거영>에 남긴 차시 가운데 떡차를 마시는 방법을 엿볼 수 있다. "바위 사립문 사이로 손님이 가신 뒤로 아무 일이 없으니(岩扉客去渾無事), 차맷돌 빙빙 돌려 직접 차를 간다네(茶   旋旋手自磨)"와 같이 차를 갈아서 마시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그리고 30여년 뒤 호의선사(縞衣.1778-1868)는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에게 차를 보냈다. 정학유는 이 차를 한 모금 목에 적시기도 전에 노동(盧仝)의 칠완다가(七碗茶歌) 나오는 넷째 잔과 다섯째 잔을 마신 듯 황홀하였다. 정학유가 온 몸에서 삿됨이 씻겨나가는 경험을 하며 마신 차는 떡차이고, 떡차를 다시 가루를 내어서 끓여 마시고 있다.

대숲 아래 이끼가 좋은 차를 길러내어,
대광주리 깨끗이 딴 응취차가 가득
자기 그릇 바람 휘감겨 연기를 가볍게 흩자,
돌솥에 눈발 날리더니 구슬 같은 꽃이 떠오르네.
신령한 찻물 혀와 목을 다 적시기도 전에,
묘한 향기가 먼저 풍겨 살과 뼈에 스미네.
털구멍 송글송글 땀이 살 풋 나더니만,
잠깐 사이 삿됨을 씻어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네

다산이 세상을 떠난 지 10여년이 지난 뒤, 그의 아들이자 <다신계>의 계원들은 여전히 떡차를 가루로 내어 탕으로 마시고 있었다. 사실 이 차는 우리가 아는 잎차의 탕과는 조금 차이가 있고, 일본의 말차와도 차이가 있다. 앞서 제다법에서 살펴본, 1830년 다산이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 "찰기가 져서 마실 수가 있다네(稠粘可嚥)"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곱게 갈지 않으면 마시고 난 다음에 입에 조금 씹히는 식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다신계>의 후예
1818년, 다산이 해배를 할 때 만들어진 <다신계>의 전통은 1930년대 까지 이어졌다. 물론 그 사이 <다신계>가 지속적으로 정상적인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1835년 다산은 <다신계>가 무신계가 되었다고 자탄을 하였다. 다산의 사후, <다신계>의 주요현장이었던 다산초당을 방문한 이들은 쇄락하여 폐허가 된 모습에 감상에 젖어 눈물을 흘린다.

1848년 다산의 막내제자 이시헌(李時憲, 1803-1860)은 이곳을 방문하여 <다산에서 옛날을 그리며(茶山感舊)>란 시 두편을 지었고, 황상(黃裳, 1788-1863)도 1850년대에 이곳을 찾았다가 <다산의 옛터를 슬퍼하며(悲茶山古墟)>란 시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외손인 윤정기(尹廷琦, 1814-1879)도 1860년에 이곳을 찾았다가 <귤동초당 옛터를 찾아(訪橘洞草堂舊址)>란 시를 남겼다.

이들이 남긴 시에는 '정석(丁石)'이란 다산이 새긴 각자만 남아 있고 폐허가 된 쓸쓸한 풍경 뿐 이라는 것을 공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석이란 각자 외에 다산이 남겼던 것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다신계절목> <약조>에서 명시한 바대로 동암의 지붕을 계속 이어갔다면, 이 같은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산의 사후 10여년이 지난 뒤, 이미 다산초당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1936년 4월에 간행된 <카톨릭 청년> 제4권 4호에는, 김재석(金在石)이 쓴 <다산의 유적을 강진에 찾아>란 기행문에서도 정석이란 각자만 남아있는 것을 기록하였고, 3년 뒤 방문한 일본인 이에이리 가즈오는 마치 동암과 서암이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혼란이 빗어지는데, 동암과 서암의 기능을 잘못 기술하고 있다.

원래 초가였던 다산초당은 다산선생이 유배가 끝나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 호랑이가 출몰하고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폐허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1956년 낙천 윤재찬(尹在瓚, 1902-1998)은 송령(松嶺) 윤재은(尹在殷) 등과 '다산초당복원위원회'를 구성하고 성금을 모아 건물을 지었다. 1957년 3월 7일 착공하여 1958년 5월 5일 준공하였고, 1958년 1월 정다산유적보존회에서 윤재은을 편집인으로 하여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을 발행했다.

이때부터 강진에서 꺼져가던 다산의 불씨가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주축이 된 사람은 윤재찬인데, 그의 삼대조 할아버지가 <다신계>의 계원이었던 윤종심이다. 윤종심은 <다신계절목>에서 귤동의 차를 관리하였던 윤동(尹峒)이고 호를 감천(紺泉)이라고 하였다. "낙천이 없으면 강진에 다산이 없고, 강진의 다산은 낙천이 지켰다"고 하는 양광식(梁光植, 1947- )의 증언은 다산과 낙천의 관계를 함축적 표현으로 요약했다고 할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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