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38]
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38]
  • 강진신문
  • 승인 2019.07.1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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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 _ 한자·한문 지도사

且 또 차/도마 조

'且'자는 발음은 2가지다. '또'라는 뜻으로 쓸 때는 '차'로 읽지만 '도마'로 쓸 때는 '조'로 읽는다. '도마 조(俎)'자는 나중에 만들어진 글자인데 바로 且(조)자에 '고기 육(肉)'을 합친 글자이다. 俎(조)자를 오른쪽방향으로 한번 눕혀보자. 두 덩어리의 고기가 도마 위에 올려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갑골문 且(차 또는 조)자는 나무로 만든 그릇이라는 설도 있다. 조상에게 제사를 올릴 때 특별히 고기를 담았던 제기(祭器)라는 것이다. 사실 '보일 시(示)'자는 제사상(祭祀床)을 그린 글자이다. 그런 제사상위에 육고기를 올리는 모습이 '제사 제(祭)'자이니 '조상 조(祖)'자 또한 제사의식에서 잉태된 글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상상력을 좀 더 확장시키면, 힘 력(力)이 들어간 '도울 조(助)'는 제사 지낼 때 서로 힘을 보태는 것을 말하고, 벼 화(禾)자가 들어간 '세금 조(租)'는 제사 때 필요한 곡식을 십시일반 거두는 관습을 반영한 글자로 보인다. 물론 且자에 대한 더 재미있는 해석도 있다. 남성의 특정한 신체부위와 관련된 내용이라 지면에 옮기는 일은 자제 한다. 하지만 누가 그 상상의 나래를 꺾을 수 있겠는가? 
 

宜 마땅할 의

'마땅할 의(宜)'자의 갑골문자를 보자. 그릇에 제물(祭物)이 담겨있다. 제물은 바로 육(肉)고기이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조상의 祭祀床(제사상)위에 이 그릇을 올려놓으니 한결 마음이 뿌듯하고 흡족하다. 이런 중첩된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하기에 '마땅하다'보다 더 알맞은 말은 없지 싶다. 宜(의)자는 내 고향 강진과 매우 친근한 글자이다.

다산 선생이 귀양살이동안 처음으로 살았던 사의재(四宜齋)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유배 온 다산을 큰 해독(大毒)처럼 여기고 문을 부수고 담장을 허물고 달아났다. 얼마나 불쌍했던지 샘 옆 주막집 늙은 주모가 방 한 칸을 내주었다. 다산은 그 방을 '네 가지(생각, 용모, 말, 행동)를 마땅히 하는 방'이라는 의미로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의(宜)는 곧 의(義)라고 하면서 의(義)로써 스스로를 규제했다. 다산은 문을 닫아 걸고 외로움과 싸웠지만 마침내 공부할 틈(暇)을 얻었다고 기뻐했다(自慶). 잠자는 것과 먹는 것을 잊은 채(忘寢與食) 고경(古經) 연구에 매달렸다. 다산에게 있어 사의재(四宜齋)는 고독한 곳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슬픈 곳은 아니었다.

 

射 쏠 사

'쏘다 사(射)'자의 현재의 글꼴은 '몸 신(身)'과 '마디 촌(寸)'의 결합이다. 활과 화살과 손으로 무언가를 향해 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이 고대글자는 세월이 흐르면서 활과 화살은 생뚱맞게 몸 신(身)으로 변했지만, 손만은 '마디 촌(寸 : 손을 의미한다)'으로 원형을 살렸다.

심리학 관련 책을 읽다가 던질 투(投)와 쏠 사(射)로 결합된 투사(投射, projection)라는 용어와 만났다. 자신의 생각이나 욕구, 감정 등을 타인에게 쏘아서 자기 것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것으로 여기는 심리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면, 내가 A를 미워하면서 오히려 A가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해서 책임소재를 남의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이런 투사도 있다. 남녀가 사랑할 때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무의식적으로 투사(投射)하여 상대를 고르는 심리작용이다. 해서 성격이 급한 여성은 느긋한 남성을, 이성적인 남성은 감성적인 여성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커플들의 문제는 의존성이다. 부족한 점을 상대를 통해 보충하려는 심리가 의존성이다. 이것이 커지면 커질수록 성격차이란 이유로 심한 갈등을 겪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愛 사랑 애

'사랑 애(愛)'자의 고대글자로 눈길을 돌려보자. 이 그림문자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아야 이해가 빠르다. 먼저 윗부분은 벌린 입이다. 가운데는 몸통과 심장(心)이다. 아랫부분은 다리이다.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는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면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걸어가고 있는 '사랑에 빠진 한 인간'을 형상화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이 그림에서 나르시시즘, 자기애(自己愛)에 빠진 한 인간을 상상해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자기애는 있고 또 당연히 있어야 한다. 문제는 지나친 경우다. 돌아보면, 나 역시 젊은 한때 자기애에 빠진 적이 있었다. 특징은 이렇다.

항상 다수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이름이 드러나기를 바란다. 해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봐 근심하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우월감에 도취(陶醉)된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기본원리인 '너와 나의 관계성'보다는 늘 '나'라는 존재를 더 우위에 놓고 판단한다. 不學則固(불학즉고)라는 말이 있다. 논어에 나온다. 배우지 않으면 완고해진다는 말이다. 자기를 과시하는 일이 아니면 아무리 좋은 일도 일단 거부부터 한다.
 

危 위태로울 위

세상을 살다 보면 기회(機會)가 있듯이 위기(危機)도 있게 마련이다. '위태로울 위(危)'자의 현재 글꼴은 불안의 극치를 보여준다. 벼랑()끝에 서있는 사람은 조심하지 않으면 떨어질까 봐 불안하고 아래에 있는 사람()은 언덕이 무너질까 봐 불안하다.

위(危)자의 갑골문을 보자. 화살표가 밑으로 향해있다. 무엇을 나타내는 표식일까? 추락(墜落)이다. 고대인은 어떤 일이 벌어지기 전에 느끼는 불안(不安)보다는 추락 그 자체에서 '위태롭다'는 개념감각을 느꼈던 것 같다.

평소 잘나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평소 흠이라고 없을 것 같은 사람이 한 순간 오명을 뒤집어쓰고 고개를 떨군다. 남의 일이거니 치부만 해서는 안될 것 같다. 나도 한 순간 삐걱해 당사자가 될 수 있음을 늘 염두 해 두어야 한다. 다산 선생은 생각, 용모, 말, 행동 네 가지를 의(義)로써 제어할 때 마땅함(四宜)을 얻는다고 했다. 어디 생각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는가? 그것을 규제하고 절제하는 것만이 위(危)를 예방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律 법률 률/율

'律(율/률)'자는 법률(法律), 자율(自律), 조율(調律)등의 단어로 쓴다. '(걸을 척)'과 聿(붓 율)'의 결합자이다. 척()은 다닐 행(行)의 왼쪽 글자로 본래 사거리를 뜻한다. 모양이 정형화되긴 했으나 한자의 뿌리인 3,300년 전 갑골문을 그대로 옮겨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律(율)자의 갑골문은 세 가지의 그림요소로 되어있다. 왼쪽부터 길과 붓과 손이다. 손으로 붓 한 자루를 들고 있는 모습이 붓 율(聿)이다.

붓 필(筆), 글 서(書), 그을 획(劃), 그림 화(畵)등은 모두 聿(율)에서 파생된 글자들이다. 갑골그림을 해석하면 '붓(聿)이 가는 길'이다. 그러면 무엇이 그 길을 선택하는가? 인간의 손이다. 인간의 자율(自律)이 길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선택권은 인간에게 있지만 붓의 법칙, 필법(筆法)을 따라야 품격을 얻는다는 것이다. 자율(自律)이란 그런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규칙을 부여하는 것이 자율이다. 그러면 타율(他律)은 무엇인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타율이다. 욕구나 욕망의 지배를 받으니 곧 타율인 것이다. 자율과 타율은 밖으로부터 주어진 그 무엇이 아니다.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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