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계에서 만든 차를 그대로 복원하다
다신계에서 만든 차를 그대로 복원하다
  • 김철 기자
  • 승인 2019.07.15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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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준 교수의 다산정차를 말하다]

 

찌고 말리는 삼증삼쇄 떡차...갈아서 마시는 다산정차

지난해 다신계 탄신 200주년을 기념해 다산선생이 마셨던 차를 다산정차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복원해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박희준 한국차문화학회 회장의 자세한 설명으로 다산정차에 이해를 돕고 강진차를 사랑하는 계기를 만들어 본다/편집자 주

■차의 종류
다산은 1810년에 이미 수 백 근의 차를 만들었다. 그 차가 어떤 종류의 차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산이 남긴 여러 시문과 간찰을 통해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다신계절목> '약조'에 나타나는 차는 잎차와 떡차이다.

"곡우 날에 어린 찻잎을 불에 말려 1근을 만들고, 입하가 되기 전 늦차를 따서 떡차 2근을 만든다. 이 잎차 1근과 떡차 2근을 시와 편지와 함께 부친다"

이 글에서 잎차는 곡우 때 만들고, 떡차는 입하가 되기 전에 만든다고 하였다. <다신계>의 제다법에는 잎차와 떡차를 만드는 방법이 함께 있다. 잎차를 만들 때 이용한 '배(焙)'라는 제다방법은 불의 화기를 이용한 살청의 방법(炒靑)으로 흔히 덖음차라고 오늘날의 차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떡차를 만들 때 표현한 '작병(作餠)'은 형태를 만드는 성형과정이다. 떡차를 만들 때 반드시 거쳐야 할 찌고 건조과정이 생략된 표현을 하고 있다.

다산이 자신의 제다법을 설명할 때는 '배(焙), 쇄(), 증포(蒸曝), 증쇄(蒸)', 그리고 '배' 또는 '쇄'를 합하여 '배쇄(焙)'란 표현을 썼다. 이 제다법들은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의 실험을 통해 수정보완의 과정을 거쳐 '구증구포'와 '삼증삼쇄'를 한 다산의 떡차가 탄생한다. '구증구포'와 '삼증삼쇄'는 찌고 말리는 횟수에 따른 구분이기 때문에, '증포'와 '증쇄'는 같은 제다공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다신계>의 차는 배쇄법에 의한 잎차, 증포 또는 증쇄법에 의한 떡차로 크게 나뉜다. 잎차는 산차의 형태로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형태의 차이고, 다산의 떡차는 남도지방에서 돈차라고 전하는 <다경>식의 떡차와 다른 성형을 하였다. 돈차는 차를 쪄서 절구에 찧어서 성형하여 말리는 차이다. 이에 반하여 다산의 떡차는 차를 쪄서 말린 다음 가루를 내고, 다시 반죽을 하여 성형하여 말리는 단차(團茶)형태의 차이다. 이 제다법의 형식은 다산이 다산초당 시절 쓴 <경세유표>의 '각다고'에서 찾을 수 있다.

무릇 차는 두 종류가 있는데 편차(片茶)와 산차(散茶)가 그것이다. 편차는 쪄서 만든다. 모양틀에 채워서 가운데를 꿴다. 다만 건주(建州)와 검주(劍州)에서는 찐 뒤에 갈아서, 대로 엮어 격자를 만들어 건조실 안에 두므로 가장 정결하다. 다른 곳에서는 만들지 못한다.

■제다 과정
▣ 살청과 건조
<각다고>에서는 차의 두 종류로 편차와 산차를 들고 있다. 여기서 편차는 쪄서 만든 뒤 모양틀에 채워서 가운데를 꿴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 건주와 검주에서는 찐 뒤 갈아서 만든다고 하였는데, 앞에 기술한 모양틀에 넣어서 꿰는 과정은 표현에서 생략하였다.

다산의 제다법을 표현할 때의 방식을 따르면 '일증일쇄(一蒸一)'의 방법에 해당하지만, 다산처럼 햇빛에 말리는 것이 아니라 밀페된 실내에서 말리는 배건(焙乾)의 방법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일증일배(一蒸一焙)'의 제다방법이 된다. '배'는 '말린다'는 뜻이다. 다산은 햇볕이나 바람을 이용해 자연적으로 말리는 것을 '포' 또는 '쇄'라고 하였고, 비교적 낮은 인위적인 열을 이용하는 살청이나 배건과정을 함축적으로 '배'라고 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이에 대한 적지 않은 연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설이 나오지 않고 있다. 오늘의 관점에서 옛 기록을 추단하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다산의 잎차가 쪄서 말리는 차로써, 떡차를 만들기 전단계의 잎차라고 한 정민교수의 의견은 좀 더 검토를 해보아야 할 것이다.

▣ 성형
다산의 떡차는 병차(餠茶) 또는 차병(茶餠)이 혼용되고 있는데, 이 두 가지 명칭이 어떤 구분이 있는지는 그동안의 밝혀진 기록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다산의 제다방법이 비교적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은 1830년, 제자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을 수 있다.

"올 들어 병으로 체증이 더욱 심해져서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고자 오로지 차떡에 의지하고 있네. 이제 곡우 때가 되었으니, 다시 계속해서 보내 주기 바라네. 다만 지난 번 보내준 차떡은 가루가 거칠은 것 같아 심히 좋지가 않았네.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서 아주 곱게 갈고, 또 반드시 돌 샘물로 고르게 조절하여 진흙같이 짓이겨서 작은 떡으로 만든 뒤에야 찰기가 져서 마실 수가 있다네. 살펴주면 좋겠네."

이 떡차를 만들려면 세 번 찔 때 찌는 시루가 있었을 것이고, 세 번을 말릴 때는 말릴 수 있는 채반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루를 내어 반죽을 하여 짓이겨서 진흙처럼 만들려면, 가루를 내는 다연(茶 )과 짓이기는 절구(搗臼)와 절구공이(舂杵)가 필요하다. 그 뒤 작은 떡처럼 만들려면 다식판처럼 생긴 권모(捲摸)가 필요하다. 곱게 갈아서 만드는 방법이라 다식판 같은 틀을 이용하면, 그 문양이 살아나기 때문에 용단 또는 단차라는 이름이 뒤따랐는지도 모른다. 말리는 방법은 자연의 햇빛과 바람을 주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 포장
1814년 4월,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 1772-1839)가 다산을 찾아왔을 때 다산의 <차운수문산(次韻酬文山)>란 시에서 "곡우 지나 새 차가 비로소 기(旗)를 펴자, 차 바구니 차 맷돌을 조금씩 정돈한다"라 하였다.

다구는 차를 말릴 때 대바구니이고, 다연은 쪄서 말린 찻잎을 빻을 때 쓰는 도구이다. 다산의 차가 떡차를 만들 때 가루를 내어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내용이다.

다산의 떡차를 성형하여 포장을 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1818년 7월에 묶은 <육로산거영>에 실린 시에서 수룡 색성은 "1백 꿰미 향차가 푸른 산에서 난다(百串香茶産碧山)"고 했다. 백곶(百串)의 향기로운 차란 표현에서도 떡차를 꿰미에 꿰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818년 12월, 대둔사에서 수룡 색성과 다산의 제자 윤종영(尹鍾英), 윤종민(尹鍾敏) 등이 함께 지은 시집인 <가련유사(迦蓮幽詞)> 가 있다. 그 가운데 윤종민의 시에 "필상 위 차 꿰미는 산동(山童)에게 맡긴다네(筆牀茶串付山童)"라고 한 구절이 있다.

즉 <다신계>와 <전등계>에서 만드는 떡차는 노끈이나 꼬챙이에 꿴 차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방법은 육우의 <다경>에서 부터 전해오는 방법이다. 다산은 <다경>에 나오는 제다법을 변형한 송대 단차를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고 마지막 포장하는 방법에서는 구멍을 내어서 꿰미에 꿰는 <다경>의 방법을 채용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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