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37]
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37]
  • 강진신문
  • 승인 2019.06.2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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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 _ 한자·한문 지도사

能 능할 능

 '능하다', '할 수 있다' 뜻을 가진 '能(능)'자는 본래 곰이었다. 머리와 발을 크게 그렸다. 현대인이 동물원이나 GEO WILD의 동물다큐 영상을 통해 만나는 곰을 고대인은 야생에서 자주 맞닥뜨렸을 것이다.

범도 두려워하지 곰과 동일시하면서 '능력'이란 개념을 추출해내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웅녀(熊女)의 熊(곰 웅)자와 태도(態度)의 態(모습 태)자도 모두 능(能)자에 기원을 둔다.

인간은 두 가지 능력을 타고난다. 육체적 능력과 인지적 능력이다. 과거의 기계는 육체적 능력에서 인간과 경쟁했지만 인지적 능력에서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자동화되어가는 물결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주인으로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이러한 구도가 2100년에도 계속 되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인간의 인지적 능력이란 학습과 분석, 의사소통, 무엇보다 인간감정을 읽어내는 능력을 말한다. AI(인공지능)가 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능력만큼은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AI는 인지능력에서 이미 인간을 추월했고 마지막 남은 과제인 인간의 감정까지도 읽어내려고 한다. 기계에게 추월당한 인간은 어디로 가야만 할까?


 

事 일 사

고대글자 '일 사(事)'자의 맨 아래는 손이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물건을 들고 있다. 어떤 학자는 '장식된 붓'으로 보고 사관(史官)이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주술도구로 보고 제사를 주관하는 모습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고대글자를 살펴보면 이 事(사)자는 史(역사 사)자나 吏(벼슬아치 리)자와 모양이 매우 흡사하다. 아마도 동일한 개념인데 표현상 미묘한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 가려 썼던 것이 아닌 가 추축해본다.

그림만 볼 때 최초로 문자를 만들었던 고대의 지식인도 '일'이라는 개념을 인간의 육체적 능력보다는 인지적 능력에 더 비중을 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능(能)자에서도 언급했지만, 안타깝게도 인류역사에서 인간의 인지적 능력이 점점 힘을 쓰지 못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미래학자 커즈와일은 그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에서 2045년쯤 되면 인공지능(AI)이 인간지능을 추월하는 시점이 올 수 있다고 말하면서 바로 그 지점을 특이점(singularity)이라고 불렀다. 그때에도 지금 10대 청소년들이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기 바란다면 무엇을 가르치고 준비시켜야할까.


 

更 고칠 경, 다시 갱

'更'자는 뜻에 따라 발음이 두 개다. '고치다'로 쓸 때는 '경'으로, '다시'로 쓸 때는 '갱'으로 읽는다. 更新(경신:고쳐서 새로워짐)과 更新(갱신:다시 새로워짐)이 같은 모양자이지만 뜻이 다른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갑골문을 보면, 지팡이 같은 막대기로 뭔가를 치고 있는 모습이다. 三更(삼경)이란 말이 있듯 '시각'을 알리는 용도로 만든 글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갱신(更新)은 IT(정보기술)용어로는 업데이트(update)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표현을 빌리면, AI(인공지능)는 인간이 아니란 이유만으로 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바로 연결성과 업데이트(更新) 능력이다.

예를 들면, 지구상에 인간 의사가 300만 명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한 연구소에서 암 치료를 위한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했다. 그런 신기술을 아주 짧은 시간에 인간 의사 모두에게 숙지시키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AI 의사가 전 세계에 100억 개가 있다 해도 그러한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수 있다. AI 의사들은 하나의 몸처럼 서로 연결되어있어 순식간에 업데이트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의사를 더 믿게 될까?


 

倉 곳집 창

'곳집 창(倉)'자는 말 그대로 창고(倉庫)를 그렸다. 여기에 칼 도( )를 더하면 창의(創意)의 창(創)자가 된다. 심리학계의 세계적인 석학 '칙센트미하이'의 <창의성의 즐거움>을 두 번째 읽었다.

이 책이 나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특히 두 가지였다. 먼저 창의적인 사람의 양면적 특성이다. 그들은 외향성과 내향성, 천진난만함과 진지함, 장난기와 끈기(인내) 등 서로 반대되는 특성을 함께 갖고 있다. 사람들이 대게 하나의 성향에 치우친 반면 그들은 양극단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다중지능이란 말이 있듯이 다중인격자들이다. 창의를 모토로 내건 교육현장에서, 그런 아이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릴 때, 혼란스럽다는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그 잠재력을 알아볼 수 있을 까 마음이 무거웠다. 또 하나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선다' 말이다.

여기에서 '거인'은 지식이든 기술이든 한 분야에서 이뤄낸 과거의 업적을 총칭한다. 그러한 업적을 자신의 창고(倉庫)안에 가득 채울 때 비로소 창의적 사고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일어난다고 한다. 필요할 때 꺼내 칼질할 재료가 없는데 어떻게 맛있는 요리가 나오겠는가? 이 책은 거듭거듭 강조한다.

 

自 스스로 자

'스스로 자(自)'자는 원래 코를 의미했다. 코는 중앙에 위치하며 얼굴의 기둥이다. 자존심(自尊心)이란 개념의 상징이 될 만하다. 코는 폐와 통한다. 생명의 기운이 운행하는 자리다.

그래서인지 자(自)는 근본적으로 구속과 억압을 싫어한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로 여긴다. 모든 권위는 궁극적으로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에서 나온다고 믿으며 개인의 자율적 선택을 존중한다.

정치에서 자유주의는 유권자가 제일 잘 안다고 믿는다. 따라서 민주적인 선거를 지지한다. 경제에서 자유주의는 개인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언제나 옳다고 믿는다. 따라서 자유시장 원리를 반긴다.

교육에서 자유주의는 자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마음에서 답을 찾으라고 말한다. 교육의 현장에서 매일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울려 퍼진다. 인권에서 자유주의는 어떠한 경우라도 타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신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듯 타인의 자유도 그렇게 대하라고 말한다. 이런 자유주의가 당파적인 논리로 왜곡되고, 무시되고, 유린당하기까지 한다. 인간의 자유는 생명 그 자체인데도 말이다.

 

均 고를 균

'균(均)'자는 뭔가를 '고르다', '가지런히 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처음에는 균(勻)으로 썼다. 나중에 土(흙 토)자가 더해지면서 뭔가 두리뭉실했던 뜻이 손에 잡히듯 구체화되지 않았나싶다. 그러면 가운데 두 점을 싸고 도는 긴 선은 무엇일까? 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류에게 삶의 패턴은 균일(均一)했다. 인생 전반부가 배우는 시기라면 후반부는 일하는 시기였다. 대게 전반부는 학습을 통해 지식과 기량을 쌓고 후반부는 그것을 밑천삼아 세상을 활보했다. 하지만 미래학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변화의 속도는 빨라지고 그러한 전통적인 패턴은 21세기 중반쯤 되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유물로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배움 따로 일 따로가 아닌 끊임없이 배우고 자신을 쇄신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화석처럼 되고 말 거란 이야기도 덧붙인다. 그런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보다도 풍부한 감성적 균형감(均衡感)이라고 한다. 점점 더 낯선 것이 일상이 되면서, 인간은 과거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과 매일 맞닥뜨려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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