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쌓아준 성 - 설성 병영성의 전설
눈이 쌓아준 성 - 설성 병영성의 전설
  • 강진신문
  • 승인 2019.05.24 16: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집] 김해등 작가와 함께하는 동화로 살아나는 강진의 전설
- 정라병영성(7) -

 

병영성은 '설성'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해져 내려온단다.

'설'은 눈을 뜻하는 한자야. 그러니까 병영성이 겨울에 내리는 하얀 눈과 관련 있다는 상상이 가능하겠지? 그럼, 병영성에는 어떤 신비로운 얘기가 전해져오는지 한 번 들어나 볼까?

조선의 삼 대 왕인 태종 때였어. 신하가 광산, 그러니까 지금의 광주 송정리의 전라병영에서 보내온 장계를 올리며 아뢰었어.

"왜구가 출몰해 큰 피해를 입었다 하옵니다."
"뭣이! 한 달 전에도 나타나지 않았더냐?"
"황공하옵니다, 전하!"

신하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벌벌 떨었어. 불같은 성격을 가진 태종 왕은 실수를 내버려두지 않기로 유명했어. 어쩌면 신하들 몇의 목이 날아갈지도 몰라. 모두들 왕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어.

그런데 왕이 화 대신 깊은 한탄을 하는 거야.

"백여 명의 선량한 백성이 죽었고, 불탄 집이 쉰 채나 되고, 빼앗긴 재물들은 헤아릴 수가 없다니!"
"전하……"
"고개만 조아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느냐? 대책을 내놓으란 말이다. 엉!"

왕은 호통을 치며 눈을 부릅떴어. 신하들은 오금이 저려 오줌을 지릴 정도였어.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간 목이 날아갈 판이라 쉬이 입을 열지 않았지. 그때 누군가 나섰어.

"전하!"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마천목 장군이었어.

"전라병영을 바닷가로 옮기심이 어떠신지요?"
"바닷가?"
"예, 전하! 광산의 전라병영은 바다와 너무 멀어 왜구의 침략에 즉각 대처할 수가 없사옵니다."
"옳지! 좋은 방법이오. 그래, 장소는 어디가 좋겠는가?"
"도강(지금의 강진)현이 좋을 듯하옵니다."
"도강현이라……."

왕은 한참을 궁리한 끝에 무릎을 탁 쳤어.
"도강현이라면 마 장군이 태어난 곳이 아니던가?"
"전하, 맞사옵니다."
"허허, 이제야 발 뻗고 자겠구나. 마 장군을 병영을 옮기는 총책임자로 임명하니 만전을 기하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마천목 장군은 뛸 듯이 기뻤어. 고향의 백성들이 왜구로부터 목숨을 잃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거든. 전라병영의 총사령관이 된 마천목 장군은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갔단다.

먼저 병영이 들어설 마땅한 장소를 찾아야 했어.

장군은 한참을 물색한 끝에 기가 막힌 곳을 찾아냈어. 바로 지금의 병영성 자리였지. 그곳은 넓은 들이 있어서 많은 곡식을 거둬들일 수 있는 곳이야.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기에 충분했지. 뿐만 아니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적의 침입을 막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아뿔싸!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넓디넓은 곳 어디에다 그리고 어느 정도 크기의 성을 쌓을지 가늠할 수 없는 거야. 장군은 방방곡곡에서 성을 쌓는 사람들을 끌어 모았어. 위로는 병법에 능한 자, 아래로는 석수장이까지 죄다 모여 들었지. 그렇지만 저마다 의견이 달랐어.

성을 쌓는 위치를 몰라 몇 달이 훌쩍 지나갔어.
그 사이 왜구들의 노략질은 몇 번이나 이어졌지. 아직 병영을 옮겨오지 못한 탓에 눈뜨고 당할 수밖에 없었어. 그러자 백성들의 불만이 엄한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어.
왕은 여러 신하들 앞에서 불만을 터트렸어.

"믿었던 마 장군이 그리 형편없었던 거냐?"
"전하! 마 장군이 왜구와 내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염려되옵니다."
"뭐, 뭣이라?"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 늦어질 리가 없사옵니다."

성질 급한 태종 왕은 기가 막혀 몸을 부르르 떨었어. 그렇지만 신하들의 말만 믿고 마천목 장군을 처벌할 수는 없는 일이야. 태종이 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마천목 장군의 공이 컸거든.

신하들이 마천목 장군을 처벌하자고 난리를 쳤어. 왕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명령을 내렸어.

"올 겨울 안까지 성을 쌓는 일이 시작되지 않으면 마 장군에 대한 어떤 처벌도 막지 않겠다!"

마천목 장군도 이런 소식들 전해 들었어. 끝까지 믿어주는 왕이 고마워 납작 엎드려 절을 했어. 이제 서둘러 성의 위치를 잡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야. 하루라도 빨리 왕의 믿음에 보답해야겠다고 다짐했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병영의 수인산에 올라가 들판을 가늠해보기로 했어. 그러다 깜박 잠이 들었지 뭐야. 꿈속에 웬 백발노인이 나타나 다짜고짜 꾸짖는 거야.

"마음이 앞서다보면 놓치는 게 많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대체 뉘신데 그리 함부로 말씀을 하는 겁니까?"
"이런! 조상도 몰라보는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

백발노인은 몸을 돌려 홱 돌아섰어. 장군은 뜨끔해 재빨리 노인의 옷자락을 붙잡았어.
"자, 잠깐만요. 몰라봐 죽을죄를 졌습니다."
"험, 험!"

백발노인은 못이긴 척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어. 그러고는 한 마디 냅다 던지는 거야.
"눈뜬장님이 아니고서야 그걸 몰라?"
"네?"
"하늘의 뜻이 미치지 않는 세상 일이 어디 있는 줄 아느냐!"
장군은 영문을 몰라 눈만 멀뚱멀뚱 떴어. 노인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손을 내밀었어. "거, 활과 화살 좀 내놔라."

백발노인은 활을 장난감 다루듯 손쉽게 시위를 당기는 거야. 그러더니 어느 한 곳을 향해 활을 쏘았어. 바람을 먹은 화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갔어.
"저 화살 닿는 곳이 성의 중심부다!"
백발노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어.

장군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어. 백발노인이 마치 살아있는 듯 해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폈어. 꿈속의 노인이 보일 리가 없었지.
"거 참, 희한한 꿈이로구나!"

장군은 생각에 잠긴 채로 산을 내려갔어. 그런데 참 이상한 거야. 발걸음이 저절로 백발노인이 쐈던 화살이 날아가는 데로 가는 게 아니겠어?
"아, 화살 닿는 곳이 성의 중심부?"

장군은 꿈속의 백발노인이 했던 말을 읊조렸어. 그러고는 부리나케 화살이 떨어진 자리를 찾아갔어.
"있다! 정말 화살이 있다!"

놀랍게도 화살 하나가 깊이 박혀있는 게 보였어. 장군은 화살을 뽑아들고 사방을 휘이 둘러보았어.
"허어, 바로 이곳이었어! 천혜의 요새야, 요새!"

장군은 당장 그 자리에 깃발을 꼽았어. 그러고는 일정한 넓이로 성의 둘레를 정했지. 드디어 성을 쌓기 시작하게 됐어. 여태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던 일꾼들이 우르르 달려들었어. 커다란 바위를 나르며 내는 함성소리, 정으로 돌을 다듬는 소리, 성을 쌓으며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졌단다.

성을 쌓기 시작한지 한참 지났을 거야.
어느 날 석수장이들이 몰려와 다급하게 외쳤어.
"자, 장군님. 크……큰일 났습니다요!"
"웬 호들갑이냐?"
"성이 와르르 무너져버렸습니다."
"뭐, 뭐라?"

장군은 석수장이들을 따라 달려갔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들이 벌어져 있는 거야. 성벽들이 처참하게 무너져 돌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어. 가만 살펴보니 땅이 꺼지고 물이 솟아 저절로 무너져버린 것이었어. 자리를 조금 옮겨 쌓아도 마찬가지야. 엎친 데 덮친다고 크고 작은 사고들이 터지기 시작했어. 다치거나 죽은 일꾼들이 늘어만 갔어. 그러자 도망친 일꾼들이 생기고, 흉흉한 소문들마저 퍼져나갔어.

광대뼈 석주장이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어.
"자네, 요즘 떠도는 소문 들었는가?"
"소문이 한둘이어야지!"
주먹코 석수장이가 되물었어.
"이곳이 산들의 혈맥이라는 소문이 있어. 그러니 산신들이 노해 성을 자꾸 무너뜨린다는……."
"쉬이, 장군님 들으시면 어쩌려고!"

주먹코 석수장이가 눈을 흘기며 말문을 막아버렸어.
장군도 떠도는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지. 그래서 부랴부랴 제도 올려보고 기도도 드려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어. 도무지 성의 둘레를 어디로 정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는 거야. 성을 빨리 쌓아 전라병영을 옮기라는 왕의 재촉도 이어졌고.
때 이른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마천목 장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 겨울이 시작되면 성을 쌓는 일도 더뎌질 게 빤했거든.
"이거 정말 큰일이군. 벌써 한겨울이 닥치다니!"

장군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어.
다음날 아침, 누구보다도 먼저 성을 쌓는 현장으로 나갔어. 일터를 돌아보던 장군은 깜짝 놀라 눈을 비볐어. 밤새 내린 눈이 날이 밝기도 전에 깨끗이 녹아버렸던 거야.
"저, 저건!"

그런데 뱅 둘러 눈이 녹지 않는 하얀 길이 보이는 거야. 장군은 무릎을 탁 쳤어.
"하늘이 내게 성의 둘레를 알려준 것이야!"
장군은 부리나케 눈이 녹지 않는 길을 따라 걸어봤어. 당장 성을 쌓아도 될 만큼 굳건해 보였어. 뒤늦게 밖으로 나온 사람들도 그 광경을 지켜봤어. 그러고는 한목소리로 외쳤지.

"눈이 길을 내줘 성을 쌓게 해주네?"
"설성이야, 설성!"

모두들 하늘이 눈길로 성 둘레를 표시해줬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지.
마천목 장군은 서둘러 성곽 자리를 표시했지. 그러자 성을 쌓는 일도 척척 진행됐어. 애써 쌓았던 돌이 무너져 내리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지. 어찌나 굳건하던지 포탄을 맞아도 끄떡없을 것 같았어.

그렇게 설성, 아니 병영성은 완성됐단다.
전라병영이 지금의 병영성으로 옮겨온 뒤로 왜구들의 노략질도 끝이 났어. 병사들이 득실거리는 병영이 코앞인데 어떤 간 큰 왜구들이 들어올 수 있겠어? 어림없는 일이었지.

마천목 장군 덕분에 강진에 병영성이 생겨났던 거야. 물론 하늘이 눈으로 성의 둘레를 표시해주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 덕분에 강진은 평화로웠고, 장사꾼들도 편히 장사를 할 수 있었단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