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36]
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36]
  • 강진신문
  • 승인 2019.05.1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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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 _ 한자·한문 지도사

甘 달 감

설탕 속에 숨겨있는 슬픈 이야기
'甘(감)'자는 '달다' '맛좋다', '만족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갑골문은 '구(口)' 안에 선 하나를 그려 넣어 감각과 정서를 모두 담아냈다. 보기에 간단한 그림 같지만 학자에 따라 다른 해석들이 존재한다. 먼저 口(구)를 '입'으로 선을 '음식'으로 보는 해석이다. 배고픈 차에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달고 맛날 수밖에 없다. 식후에 따라 오는 감정이야 만족(滿足)이 아니겠는가?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는 구(口)를 혀로 보는 해석이다. 맛은 혀를 통해 느껴질 뿐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내민 혀에다 위치를 표시했다고 한다. 그곳이 단맛을 느끼는 지점이란다. 생물학적 기능에 초점을 맞췄다. 

단맛의 대명사는 설탕이다. 한때 유럽인들은 마약에 중독되듯 설탕에 열광했다고 한다. 달콤한 맛의 치명적 유혹에 걸려든 그들은 세계 곳곳에서 숲과 작물들을 걷어내고 그 땅에 거대한 사탕수수 농장을 조성했다. 설탕을 얻기 위해서는 일반농사와 달리 어마어마한 인력이 필요했다. 그들이 맛본 설탕은 흑인노예들이 흘린 고통의 눈물이었다.

 

言 말씀 언 / 辛 매울 신

그림이 함축하는 메시지
'말씀 언(言)'자의 갑골문은 두 개의 그림으로 되어있다. 아래의 그림을 입(口)으로 보는 데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 문제는 위의 그림이다. 크게 세 가지 설(說)이 공존한다. 첫 번째가 관악기고 두 번째가 혀이며 세 번째가 예리한 침이다. 나는 세 번째 설에 무게를 두고 이 그림을 매울 신(辛)자로 본다. 어느 라면 제품에 등장하는 辛(신)은 사실 살을 째고 먹물로 죄명을 새겨 넣을 때 쓰는 묵형(墨刑)의 도구였다. 오죽했으면 '맵다', '독하다'라는 뜻이 생겨났을까.

言有召禍(언유소화), 말은 화를 부를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까. 말은 가려서도 해야 하지만 가려들을 줄도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허언(虛言 실상이 없는 거짓말), 참언(讒言 거짓으로 꾸며 남을 헐뜯는 말), 간언(間言 이간질하여 서로 등지게 하는 말)이 진실의 가면을 쓰고 여기저기 난무한다. 이런 말들을 가려내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감언이설(甘言利說)에 교언영색(巧言令色)까지 더해지면 누구도 쉬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喜 기쁠 희 / 鼓 북 고

두 소리의 어울림
희열(喜悅), 희비(喜悲)등에 쓰는 '기쁠 희(喜)'자를 만나는데 지름길이 있다. '치다 고(鼓)'자다. 두 글자를 비교해 보자. 같은 그림이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이다. 고(鼓)는 손에 북채를 들고 북을 치는 모습이다. 희(喜)는 말할 것 없이 '북'에다 '입(口)'을 합쳤다. 그러면 북 옆에 보이는 네 개의 점들은 무엇일까. 북소리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소리를 시각적인 점(點)을 통해 표현했다고 한다.

우리가 평면에 묘사된 고대문자에서 질감과 역동을 느낄 수 있는 데는 이러한 표현방법을 구사할 줄 알았던 고대 창의적인 지식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구나 특정한 감정을 시각적인 기호에 담는 일은 단순히 상형문자를 만드는 것 보다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예를 들면 木(목)자와 같은 상형문자는 나무와 연결되어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감정은 딱히 연결할 대상이 없다. 고대지식인은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기쁨을 마음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조립과 해체를 수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문자가 '북과 입'의 절묘한 조합이다.

 

哀 슬플 애

깨물며 삼키는 슬픔
슬플 애(哀)자는 옷깃(衣)속에 입(口)만 보인다.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다. '슬픔'을 뜻하는 한자는 많다. 바로 애(哀), 비(悲), 통(慟), 도(悼), 창(愴), 척(慽) 등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별(離別)과 죽음, 질병(疾病)과 우환(憂患)등이다. 그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만큼 큰 슬픔은 없을 것이다. 哀而不悲(애이불비)라는 말이 있다. '슬퍼하되 슬퍼하지 말라'는 뜻이다.

슬픈데 어떻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슬픔에도 다양한 얼굴이 있다. 애(哀)가 깨물며 삼키는 슬픔이라면 비(悲)는 겉으로 드러내는 슬픔이다.  애절양(哀絶陽)은 다산선생이 1803년 가을 강진 유배지에서 지은 시다. 태어난 지 사흘밖에 안된 아기를 군보에 넣고 재산의 전부다시피한 소를 끌고 갔다. 이런 폭정 앞에 이것 때문이라고 자신의 양물을 잘라버린 백성의 한 맺힌 이야기가 배경이 된다. 다산은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을 외워본다(客窓重誦?鳩篇)."로 시를 끝맺음 한다. 귀양 사는 처지라 학정(虐政)을 듣고도 바로잡을 힘도 없다. 백성이 당한 슬픔을 깨물고 삼켜야했던 다산이다.

 

啓 열 계

힘쓰지 않으면 깨우칠 수 없다.
'열다 계(啓)'자의 갑골문은 '외짝 문(戶)'과 '손', '입'을 구성요소로 한다. 문을 열고 누군가를 부르는 장면으로 본다. 그러나 시간의 흐를수록 '열다'라는 구체적인 행동은 추상의 뜻을 파생(派生)시키는 모티브가 되었다. 바로 계몽(啓蒙), 계발(啓發), 계도(啓導), 계시(啓示)가 그것이다. 모두가 깨우치고 가르친다는 의미이다. 다음은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단편이다.

"子曰 不憤不啓 不?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服也(자왈: 불분불계, 불비불발. 거일우불이삼우반, 즉불부야)". 이 단편의 전통적인 독법은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는다. 한 모퉁이를 들어 보일 때 세 모퉁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다시 가르쳐주지 않는다."이다. 여기에 공자의 교육법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인다. 나는 학습자의 입장에서, "힘쓰지 않으면 깨우칠 수 없고 애쓰지 않으면 피워낼 수 없다. 한 모퉁이를 들어 세 모퉁이를 찾는 행위를 반복하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다."로 읽고 싶다. 맞는 독법인지는 모르겠으나 피부에 와 닿는다.

 

知 알 지

공동체를 살리는 지(知)의 전수
갑골문은 척보면 알 수 있는 그림들의 조합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설명은 각양각색이다. 3,300년 전에 살았던 문자 발명가의 의도를 알기도 어렵지만, 사람마다 그림을 보는 배경지식(背景智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갑골문 '알 지(知)'자는 세 가지를 구성요소로 한다. 방패(干)와 화살(矢) 그리고 입(口)이다. 어떤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까?

고대세계에서 전쟁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보다 훨씬 심각했다. 죽음 아니면 노예였다. 그러나 여기까지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다. 노예의 굴레는 패배한 당사자에게만 씌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후손의 후손들까지 대물림되었다. 어느 공동체든 힘을 키우는데 사활을 걸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도전을 이겨낸 공동체는 군사적 우위가 최우선임을 실감했을 것이다. 다음은 각각의 구성원들을 집단 충성으로 이끄는 신화 창조와 대외적 관계를 조정하는 외교적 역량이 아니었겠나 생각해본다. 이 모든 일은 지식(知識)과 지혜(智慧)로 축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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