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학술문화재단 제4회 국내학술대회(요약)
다산학술문화재단 제4회 국내학술대회(요약)
  • 강진신문
  • 승인 2004.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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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카메라 옵스큐라로 초상화를 그렸다

▲ 강진문화원에서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일시:2004년 8월 25일~26일
장소:강진군문화회관. 다산초당
주관:다산학술문화재단. 강진군
발표자:박무영(연세대), 이태호(명지대), 권태욱(진주교대), 윤동환(강진군수)
논평:이종묵(서울대), 최인진(명지학원), 송지원(규장각), 김언종(고려대).
종합토론:김상홍(단국대)

1.조선후기에 ‘카메라 옵스큐라’로 초상화를 그렸다.
이태호<명지대학교 교수. 한국미술사>

1980년 7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전근해서 茶山을 처음 만

▲ 명지대 이태호교수

났다. 그 때 이을호 관장께서 주관했던 다산학 연구원의『다산학보』1집에 실린 박성래 교수의「정약용의 과학사상」이라는 논문을 접한 것이, 정약용의 회화관을 정리한 직접적인 계기였다. 박교수의 논문에 소개된 정약용의 ‘칠실관화설(漆室觀畵說)’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진기의 전사인 ‘카메라 옵스큐라’에 관한 실험인데다, 화가의 묘사기량이 카메라 옵스큐라의 영상수준이면 좋겠다는 정약용의 주장때문이었다.
정약용은 당대 화단에서 ‘畵意不畵鎣을 내세운 남종화풍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사실묘사에 충실한 그림다운 그림을 중요시하였다. 일종의 광학실험 보고서 격인 ‘칠실관화설’은 정약용의 과학정신을 보여주기도 하려니와, 대상 묘사의 사실성을 더욱 강조하는 대목이다. 또한 정약용은 이기양이 ‘칠실안’, 곧 ‘카메라 옵스큐라’로 초상화를 그렸던 장면을 묘지명에 밝혀 놓았다. 이 증언은 18세기말 정조시절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서구 광학도구의 수용에 따른 사실주의 회화의 새로운 진전을 시사한다.


정약용의 증언만으로도 조선 후기 화단에 카메라 옵스큐라가 활용되었음을 자랑할 수 있다. 실제 카메라 옵스큐라를 본격적으로 써서 인물과 풍경 그림을 그렸을 16~19세기 서양회화사에서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하였다는 증거나 기록을 남긴 사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밝힌 화가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정약용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실험하고 또 그것으로 초상화를 제작했던 증거를 구체적으로 남긴 일은 세계과학사나 회화사에서도 소중한 기록이다 하겠다. 더불어 정약용 같은 이의 과학정신과 당대 화가들의 창작과정을 기술한 비평적 증언은 현재의 미술비평에도 좋은 귀감이 된다.


이명기의 초상화는 또한 강한 조명의 서양식 인물초상화들에 비해 자극이 적고 평면적이긴 하다. 하지만 정약용의 증언과 가장 근사한 작가로 이명기를 선택한 것은 그의 초상화가 카메라 옵스큐라의 활용에 대한 기대를 충분히 뒷받침해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 얼굴과 의상에 합당한 입체화법의 개발은 대상의 진실성 표출이라는 측면에서, 동시기 유럽의 인물초상화 못지않게 예술성을 뽐낸다고 당당히 내세울 만하다. 그런 만큼 이명기의 초상화는 조선 후기 문화사에서 우리식 리얼리즘과 근대성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고전적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2.茶山의 초기(仕宦期) 산문에 대하여
박무영<연세대학교 교수. 한국한문학>


▲ 연세대 박무영교수

주지하다시피 정약용의 문장에 대한 견해는 매우 경직된 외피를 지니고 있다. 唐宋古文의 권위조차 부정하는 <五學論3>의 주장은 일견 문장 무용론에 가깝다. 문장이 긍정될 때에도 앞의 인용에서 보듯이 ‘文以載道’의 구도를 견고하게 유지한다. 당대에 유행한 명말청초의 소품문이나 소설체 등에 대한 배격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간의 연구는 정약용의 문학론의 성격은 ‘문이 도에 봉사하는’ 기본 사유 틀을 유지하면서, ‘도’의 실질적인 내용이 달라진 것이라고 정리한다. 물론 이때의 달라진 ‘도’의 내용도 “인간의 사회적 실천윤리의 가장 올바른 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진지한 것임에는 변화가 없다. 문장론에 관한 한 정약용의 문학에선 가볍고 사소한 일상의 감각을 다루는 서정 산문이나 섬세하고 기발한 미의식, 문예미의 추구 같은 것은 들어설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의 실제 문장들은 대부분 모두 실용과 경세의 문장들이다. 학문적 관심과 현실적인 목적의식을 위주로 하는 무거운 글들이 정약용 산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자신의 문장론에 매우 충실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예문의 성격을 가미한 경우라도 고문의 법식에 충실한 글쓰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정약용 산문의 특징이라면 문학론에 대한 연구에서 지적되었듯이, 그 내용적 특성 - 즉 ‘도’의 내용이 달라진 것이지, 문장에 대한 이해 자체에 있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정약용의 산문은 각 분야의 연구 자료로는 대단히 유명해진 글들이 많지만, 문학 분야에서의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산문에 대한 연구가 일천한 까닭도 있지만, 그만큼 내용상의 가치가 문예적 가치를 압도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정약용의 산문 전체를 놓고 보자면 이런 계열의 작품들은 예외적이라 할 만큼 소수이고, 초기 사환기에 치우쳐 존재한다. 이 산문들의 ‘가벼운’ 특징은 ‘문이재도’를 표방하며 엄숙하고 진지한 정약용 산문 전체의 성격과 어긋나는 것이기도 하다. 본고는 바로 이런 점에서 이 산문들을 정리할 필요를 발견한다. 특정시기에 존재하는, 작가 자신의 문학론과 배치되는 성향의 작품들의 존재란 작가로서의 정약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부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약용 초기 산문들의 방향을 제어하는 하나의 요소는 엘리트 의식이다. 사환기 정약용의 문학 활동의 중심이 되는 죽란시사는 남인 엘리트 관료집단의 모임이다. 현실에서 득의한 엘리트로서 기성질서의 핵심에 존재하는 작가가 기궤를 추구한다는 것은 사실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는 현실에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장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 시기 소품문의 유행은 ‘지배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사대부 작가의 증갗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품의 유행은 기성사회를 전복하고 해체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실제로 그러했던 것이다. 적어도 사환기의 정약용은 당대 사회의 ‘주류’였다.

 

3.다산(茶山)의 사언시(四言詩)
송재소<성균관대학교 교수. 한문학>


다산은 유배시절에 '詩經(시경)'에 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특히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詩經'의 정신을 본받아 시를 쓰라고 거듭 당부하고 있다. 다산 자신도 많은 양은 아니지만 四言詩(사언시)를 실제로 창작했다. 이렇게 다산이 시경체(시경체)의 사언시를 중시하게 된 이론적인 근거가 무엇이며, 사언시 창작의 동기와 배경 및 그 의의를 살펴보자.


다산이 '시경'을 중시한 것은 '시경'이 지닌 정치 사회적 비판 기능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자, 군신, 부부, 붕우로 대표되는 인간관계의 올바른 도리를 '시경'이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인륜의 최고 덕목을 孝(효).弟(제).慈(자)로 요약했다. 다산은 '시경'이 이러한 효,제,자를 구현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다산의 詩經觀(시경관)을 지나치게 사회적 비판의 측면으로만 이해한 감이 있다.


다산이 남긴 16편의 사언시는 2500여 수에 달하는 그의 전체 시작품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많은 양이라 할 수 없다. “사지영회 막여사언”이라 말하며 아들들에게 “수작사언”하라고 당부했던 그가 왜 지속적으로 사언시를 짓지 않았는가?


다산의 경우, 19세기에 살면서 기원전 11세기~6세기에 창작된 시형식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이렇게 2000여 년 전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많은 양의 시를 지을 수도 없으려니와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산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언시 지을 것을 강조한 것은, “충신, 효자, 열부, 양우의 측달충후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과 같은 그런 시를 써야한다는 선언적 천명이다.


다산이 4언시를 많이 짓지 않았으면서도 4언시를 강조한 또 하나의 이유는, 5?7언 근체시의 지나친 형식주의를 경계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4언시는 5?7언시에 비하여 글자 수가 적은 만큼 수식과 조탁의 여지 또한 적다. 그리고 까다로운 성율이나 구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시인의 사상과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씌어진 시가 건강한 시라 생각한 것이다.


결국 다산은 4언시를 통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시의 본질과 효용을 '시경/의 권위를 빌어 선언적으로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세미나를 경청하고 있는 방청객들. 이날 세미나에는 학계를 비롯한 재단관계자 30명이 참석했고, 정씨 종친회에서도 100여명이 행사를 관람했다.

논문4. 다산과 차 그리고 강진
<윤동환 강진군수>

다산의 생애는 삶의 전환점이 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3기로 나눠 볼 수 있다. 제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가 되어 정조의 총애를 받다가 그의 나이 40세, 신유사옥으로 강진에 유배될 때까지 득의의 시절이고, 제2기는 강진유배 18년간의 적거시절로 58세까지이며, 제3기는 유배가 풀려 임종까지 유유자적하던 말년시절이다.


다산은 20세에 차를 좋은 샘물에 끓여 맛을 시험할 정도였고(이 때 초의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혜장은 10살이었다), 차가 나쁜 버릇을 다스린다고 여겼으며 혼자서 차를 즐길 줄 알았고, 다탕의 빛깔과 향기를 자세히 감상하며 즐기는 다인이었다. 22살에는 친구들과 술을 마신 후 차를 마셔 술을 깨고 정신의 나태를 바로 잡았으며, 무더운 여름에도 차를 즐겨 찾을 정도로 생활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청년기와 중년기에 걸쳐 20년 이상 이미 다생활을 하였으며, 당시 왕실과 귀족 및 승려와 선비계층의 다문화를 체득한 다도의 대가로, 우리 차문화의 중흥조이다.


다산은 동다기(東茶記), 다암시첩(茶盒詩帖),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 등을 썼으며, 걸명소(乞茗疏) 등 47편의 다시(茶詩)를 남겼다. 다산의 차생활은 다암시첩과 여유당전서에 담긴 시문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18년 강진유배 생활 속에 남긴 ?다신계절목?은 당시의 차 제조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다신계 계사(契事)를 위해 남겨 둔 유배지 강진의 보암 서촌의 밭은 다산이 손수 가꾸던 다원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다산을 우리 차문화의 증흥조로 보는 것인데,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다산은 강진 유배 전부터 차를 즐겨 마신 다인이었다. 둘째, 다산의 차에 대한 이론이나 지식은 혜장이나 초의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셋째, 다산은 차의 이론가로 그치지 않고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종다(種茶), 전다(煎茶), 제다(製茶), 음다(飮茶)에 소용되는 지식을 남긴 실천가이자 교육자였다. 넷째 해배된 후에도 유배지의 제자들과 차회를 맺고 차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아 다생활을 계속 했다. <나머지 사진은 26일 오후에 게재합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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