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2에 대한 논평]
[논문2에 대한 논평]
  • 강진신문
  • 승인 2004.08.2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종묵(서울대학교. 한문학)

그간 다산 선생에 대한 연구는 참으로 ‘묵직’하게 진행되어 왔다. 한우충동의 방대한 저술에 먼저 압도되면서, 다산을 묵직한 학자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다산을 존경하는 태도였던 듯하다. 다산 연구는 그렇게 시작되었기에, 문학에서 다산 연구는 주로 그의 현실주의적인 한시가 중심에 있었다. 다산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시작된 1930년대 이후 70여 년간은 그래왔다.


다산의 무거움은 다산의 글이 학자용으로만 읽혔다. 박무영 선생의 《뜬세상의 아름다움》이라는 책은 다산 선생의 무거움을 벗긴 것으로 의미가 높다. 다산의 산문을 가려 뽑아 번역한 이 책은 ‘고전’ 분야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토론자가 보기에,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산 학술의 딱딱함 대신 문학의 부드러움을 부각시켰기 때문인 듯하다. 이로서 다정다감한 인간으로서의 다산이 이 책을 통하여 독자의 머리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면서 토론자는 다산의 이러한 인간적인 부드러움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궁금하게 생각하였는데, 금번 발표가 바로 이러한 궁금증을 학술적으로 해석한 글이다.


박 선생은 다산의 인간적인 부드러움이 젊은 나이, 경화사족으로서의 자신감, 원굉도의 영향 등에서 나온 것으로 들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젊은 날의 이규보나 박지원의 글은 분명 노년의 것에 비하여 기발하고 생동감이 있다.  나이는 사람을 무겁게 하고 그 글을 묵직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조선후기 유행한 소품문은 대부분 경화사족(엘리트)의 것이다. 소품의 냄새가 강하게 나기 시작하는 17세기 초반 허균이나 17세기 후반 신정하가 경화세족의 선구라 할 만한 사람들이며, 18세기 후반 남공철, 19세기 심능숙 등으로 이어지는 소품문의 대가들 역시 전형적인 경화세족이다. 이와 함께 이들은 모두 원굉도를 읽었던 사람들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젊은 엘리트 시절 원굉도를 읽었던 다산의 글 역시 소품문처럼 생기발랄한 것이라는 설명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토론자는 이에 덧붙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자리로 삼고 싶다. 첫째 17세기 이후 科體의 문제다. 쏟아지는 試券 사이에서 우수작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던 조선시대 科場에서, 考官의 눈에 ‘참신’하지 않은 것은 아예 몇 줄 읽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 문인들은 ‘참신’을 위하여 원굉도를 읽고 그와 유사한 ‘尖新’의 풍기가 강한 중국 글을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책을 수입하여 국내에서 다시 인쇄하였던 조선전기와는 달리, 조선후기에는 중국의 서적을 직수입하여 몇몇 벌열의 집에서만 보았다. 토론자는 ‘신지식’의 독점이 과거의 독점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본다. 젊은 시절 다산 선생이 섭취한 이미 고물이 된 원굉도 이외 어떠한 ‘신지식’이 있었는지 밝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한 박 선생의 생각을 듣고 싶다.


둘째 작가의 窮達이 미감을 크게 좌우하는 것은 고금에 한가지다. 토론자는 다산 선생의 〈유수종사기〉 “유년 시절 노닐던 곳을 장년이 되어 이르게 되면 이는 한 즐거움일지라. 곤궁한 시절에 지나던 곳을 뜻을 이루어 이르게 되면 이는 한 즐거움일지라. 외롭게 홀로 오가던 곳을 아름다운 손들과 좋은 벗들을 이끌고 이르게 되면 이는 한 즐거움일지라.”라는 대목에서 무릎을 친 적이 있다.

세상만사는 처지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이규보는 〈春望賦〉에서 봄을 바라보는 눈이 신분과 처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면서 부귀하고 사치한 사람의 눈에 봄풍경은 아름다기만하고 독수공방하는 여인의 눈에는 쌍쌍이 나는 제비만 보인다고 하였다. 다산 선생의 젊은 시절의 글은 사물을 보는 눈이 ‘낙관’으로 가득 차 있다. 심노숭, 이옥, 김려 등의 글은 생기발랄하지만 ‘비관’이 강하다. 다산 선생의 낙관주의에 대한 박 선생의 생각이 어떠하신지.


셋째, ‘부드러움’의 평가 문제다. 연전에 《뜬세상의 아름다움》을 두고 이렇게 질문한 바 있다. “젊은 날의 부드러움과 중년의 무거움 중 어느 것이 나은가?”라고. 이에 대하여 박 선생은 중년의 무거움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우리 문학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은 젊은 시절의 ‘가벼움’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규보가 그렇고 박지원이 그렇다. 양자택일의 논리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문학연구자’로서 다산 산문을 평가할 때, ‘부드러움’과 ‘무거움’ 중에 무엇을 높게 보아야 할 것인지 다시 한 번 묻고자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