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4]茶山의 四言詩
[논문4]茶山의 四言詩
  • 강진신문
  • 승인 2004.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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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소<성균관대학교 교수. 한문학>

다산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두 아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내가 요사이 생각해보니 뜻을 표현하고 품은 생각을 읊는 데에는 四言만한 것이 없다. 후대의 詩家들이 모방하여 본뜬다는 허물이 있음을 혐의하여 드디어 四言을 폐해 버렸다. 그러나 지금 나와 같은 처지에서는 四言詩를 짓는 것이 정말 좋다. 너희들도 風雅의 근본을 깊이 연구하고 아래로 陶淵明과 謝靈運의 정화를 채집하여 모름지기 四言詩를 짓도록 하여라.


余近思之 寫志詠懷 莫如四言 後來詩家 嫌有模擬之累 遂廢四言 然如吾今日處地 正好作四言 汝亦深究風雅之本 下採陶謝之英 須作四言也 (ꡔ與猶堂全書ꡕ 1, 447면, 景仁文化社, 「示兩兒」)


“뜻을 표현하고 품은 생각을 읊는” 것은 일반적인 詩作行爲를 지칭하는데, 일반적으로 시를 쓰는 데에 四言만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들들에게도 모름지기 四言詩를 짓도록 당부하고 있다.

여기서 다산이 말한 四言詩는 물론 詩經體의 시를 가리킨다. 다산은 유배시절에 ꡔ詩經ꡕ에 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특히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ꡔ詩經ꡕ의 정신을 본받아 시를 쓰라고 거듭 당부하고 있다. 다산 자신도 많은 양은 아니지만 四言詩를 실제로 창작했다. 이렇게 다산이 詩經體의 四言詩를 중시하게 된 이론적인 근거가 무엇이며, 四言詩 창작의 동기와 배경 및 그 의의를 살펴보고, 다산의 四言詩를 분석함으로써 그의 이론이 실제 시에 어떻게 구현되었는가를 구명하려는 것이 本稿의 목적이다.


2.


다산의 詩經論에 관해서는 이미 金興圭 교수의 ꡔ朝鮮後期의 詩經論과 詩意識ꡕ(1982), 沈慶昊 교수의 ꡔ漢文學과 詩經論ꡕ(1999)이라는 선구적인 업적에 의해서 그 성격이 자세히 밝혀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ꡔ茶山 詩經論에 있어서의 興에 대한 硏究ꡕ(金秀炅, 2003년 고려대학교 석사논문)에서 좀더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 졌다. 그러므로 다산의 詩經論에 대한 詳論은 피하기로 한다. 다만 논의 과정에서 기존의 연구업적과 견해를 달리하는 필자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개진 하고자 한다.

다산의 문학관과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四言詩와 관련하여 다산 詩經論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風’의 해석과 ‘思無邪’의 해석 두 가지라 생각한다. 먼저 ‘風’의 개념에 대하여.


風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고 또한 두 가지의 음이 있으니 그 가리키는 의미가 아주 달라서 서로 통할 수가 없다. 윗사람이 풍으로써 아랫사람을 교화하는 것은 風敎, 風化, 風俗이니 그 음이 平聲이다. 아랫사람이 풍으로써 윗사람을 찌르는 것은 風諫, 風刺, 風喩이니 그 음이 去聲이 된다. 어떻게 하나의 風字가 거듭 두 가지의 뜻을 포함하고 두 가지의 뜻을 지녔는가? …… 「詩序」에서는 두 가지의 뜻을 겸비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朱子의 ꡔ詩集傳ꡕ에서는 風刺는 제거하고 風化만을 남겨 놓았다. 비록 그렇지만 이를 바탕으로 풍자의 뜻도 강론해 볼 수 있다.


風有二義 亦有二音 指趣逈別 不能相通 上以風化下者 風敎也風化也風俗也 其音爲平聲 下以風刺上者 風諫也風刺也風喩也 其音爲去聲 安得以一風字 雙含二義 跨據二音乎 …… 序說欲兼通二義而可得乎 朱子集傳 削去風刺 孤存風化 雖然風刺之義 因可講也(ꡔ여유당전서ꡕ 2, 461면, 「詩經講義補遺」 <國風>)


비록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風’을 風化의 의미보다는 諷刺의 의미로 해석하려는 다산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같은 글에서 그는 이 風의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고 있다.


風이란 諷이다. 더러 善事를 서술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고 더러 惡事를 서술하여 스스로 깨우치게 하며, 기뻐하고 비분하며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후회하며 느끼고 움직이게 하되 잡아끌지 아니하고 스스로 깨닫게 하며 몰아붙이지 아니하고 스스로 깨닫게 한다. 이것이 風詩가 만들어진 까닭이고 詩經이 천하에 가르침이 되는 까닭이다.


風也者 諷也 或述善事 使自喩之 或述惡事 使自喩之 悅之憤之 愧之懼之 哀之悔之 感之動之 不提不挈 使自喩之 不掊不擊 使自喩之 此風詩之所以作 而詩之所以爲敎於天下也(ꡔ여유당전서ꡕ 2, 461면, 「시경강의보유」 <國風>)


다산은 여기서 風을 諷이라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諷이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넌지시 말하여 스스로 깨우치게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깨우치기 위하여 國風의 시들이 씌어졌는가? 다산은 일차적으로 임금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라 보았다. 그는 “이로 볼 것 같으면 風詩는 임금을 諷諫한 것이 아니겠는가?”(由是觀之 風詩非所以諷人主乎) (ꡔ여유당전서ꡕ 2, 462면, 「시경강의보유」 <國風>)라 말했고 또 “國風의 여러 詩도 또한 한 번 임금을 바로잡는 데에 힘쓴 것이다.”(國風諸詩 亦唯以一正君爲務) (ꡔ여유당전서ꡕ 2, 463면, 「시경강의보유」 <周南 二>)라 하여 風詩가 임금을 풍간하기 위하여 씌어졌음을 강력히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ꡔ孟子ꡕ의 “王者之迹熄而詩亡春秋作”의 해석에서 “詩亡”을 趙岐나 朱子와는 달리 “諷誦誅褒之法”이 사라진 것으로 파악하여 ꡔ시경ꡕ의 기능을 “諷誦誅褒”하는 것으로 보았다.(ꡔ여유당전서ꡕ 2, 124-5면, ꡔ孟子要義ꡕ) 이렇게 볼 때 ꡔ시경ꡕ은 국가의 제반 현실문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수단이 된다. 따라서 시의 사회적 기능이 매우 중요시된다.

다산이 風을 諷이라 하여 “스스로 깨우치게”하기 위함이라 했을 때 깨우치는 대상이 꼭 임금만이라 할 수는 없다. 앞서 인용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름지기 四言詩를 짓도록 하여라”고 당부하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詩의 근본은 父子․君臣․夫婦가 지켜야 할 도리에 있으니, 더러는 그 즐거운 뜻을 선양하기도 하고 더러는 그 원망하면서도 사모하는 마음을 넌지시 알려주기도 한다. 그 다음으로는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 항상 힘없는 사람을 구제하고 재물이 없는 사람을 구휼하고자 하여 방황하고 슬퍼하며 차마 그들을 버릴 수 없는 마음을 가진 후에야 바야흐로 詩가 된다. 만약 자기의 이해만 챙긴다면 이는 詩가 아니다.


凡詩之本 在於父子君臣夫婦之倫 或宣揚其樂意 或導達其怨慕 其次憂世恤民 常有欲拯無力 欲賙無財 彷徨惻傷 不忍遽捨之意 然後方是詩也 若只管自己利害 便不是詩


“詩의 근본”이 “부자․군신․부부가 지켜야 할 도리”에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詩”는 ꡔ시경ꡕ의 시 또는 ꡔ시경ꡕ의 정신을 구현한 詩一般을 가리킨다. 부자․군신․부부가 지켜야 할 도리를 표현하는 것이 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時政의 잘잘못을 지적하여 임금을 諷諫하는 것이 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긴 하지만, 부자․군신․부부간의 倫紀를 바로잡기 위하여 父․子․君․臣․夫․婦를 깨우치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詩의 기능이란 말이다.


후세의 詩律은 마땅히 杜工部를 孔子로 여겨야 한다. 대개 그의 시가 百家의 으뜸이 된 까닭은 三百篇의 遺意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三百篇은 모두 忠臣, 孝子, 烈婦, 良友의 惻怛忠厚한 마음의 발로이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고,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개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善을 찬미하여 권하고 惡을 풍자하여 징계하려는 뜻이 없는 것은 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뜻이 확립되지 않고 학문이 도탑지 않으며 大道를 듣지 못하여 임금을 바르게 인도하여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려는 마음을 가질 수 없는 자는 시를 지을 수 없다.


後世詩律 當杜工部爲孔子 蓋其詩之所以冠冕百家者 以得三百篇遺意也 三百篇者 皆忠臣孝子烈婦良友 惻怛忠厚之發 不愛君憂國 非詩也 不傷時憤俗 非詩也 非有美刺勸懲之義 非詩也 故志不立 學不醇 不聞大道 不能有致君澤民之心者 不能作詩(ꡔ여유당전서ꡕ 1, 443면, 「寄淵兒」)


다산이 강진에 유배된 지 8년째 되는 1808년에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여기서도 시의 정치 사회적 비판 기능을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삼백 편은 모두 충신, 효자, 열부, 양우의 惻怛忠厚한 마음의 발로이다”라 말했을 때, 이들이 모두 “임금을 바르게 인도하여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려는 마음”을 가지고 시를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의 “惻怛忠厚”한 마음을 크게 보면 “致君澤民之心”이라 할 수 있겠지만 범위를 좁혀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 남편과 아내, 친구와 친구 사이에서 울어나는 성실하고 醇厚한 마음의 발로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다산이 ꡔ시경ꡕ을 중시한 것은 ꡔ시경ꡕ이 지닌 정치 사회적 비판 기능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자, 군신, 부부, 붕우로 대표되는 인간관계의 올바른 도리를 ꡔ시경ꡕ이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다산은 “우리 道는 人倫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吾道不外乎人倫) (ꡔ여유당전서ꡕ 2, 189면, ꡔ論語古今注ꡕ 卷2)라 했다. 그리고 人倫의 최고 덕목을 孝․弟․慈로 요약했다. 다산은 ꡔ시경ꡕ이 이러한 효,제,자를 구현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다산의 詩經觀을 지나치게 사회적 비판의 측면으로만 이해한 감이 있다.

다산 시경론의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思無邪’의 해석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朱子는 採詩觀風說에 의거하여 風詩를 民俗歌謠라 규정했다. 그러나 다산은 단호하게 ꡔ시경ꡕ 전체를 “賢人君子之作”으로 단정했다.

鄭風에는 淫詩가 없습니다. 남녀가 즐거워하는 시는 모두 음란함을 풍자하는 시입니다. 詩三百은 一言以蔽之曰 思無邪라 했으니 詩三百은 一言以蔽之曰 賢人君子之作입니다. …… 詩의 찬미하고 풍자한 것은 ꡔ春秋ꡕ의 褒貶입니다. 그러므로 詩가 없어지자 춘추가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鄭風無淫詩 其有男女之說者 皆刺淫之詩也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 則詩三百一言以蔽之曰 賢人君子之作也 …… 詩之美刺 春秋之褒貶也 故曰 詩亡而春秋作(ꡔ여유당전서ꡕ 2, 404면, 「詩經講義」 卷1, <叔于田>)


다산은 朱子와 달리 思無邪를 作詩者의 마음으로 보았다. 시를 지은 사람이 賢人君子이기 때문에 마음에 사악함이 있을 수 없다. 또한 현인군자가 지은 시에 淫詩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현인군자가 思無邪의 마음으로 지었기에 ꡔ시경ꡕ은 ꡔ춘추ꡕ에서의 褒貶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다산은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賢人君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다산의 말을 빌린다면 “惻怛忠厚”한 마음을 가진 “忠臣, 孝子, 烈婦, 良友”를 지칭한다. 결국 忠臣, 孝子, 烈婦, 良友가 思無邪의 마음으로 孝, 弟, 慈를 노래한 것이 다산이 생각하는 ꡔ시경ꡕ인 셈이다.


3.


ꡔ여유당전서ꡕ에는 총 16편 39章의 四言詩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 分章하지 않은 것이 5편이다. 이를 시기별로 보면 유배 이전의 시가 2편 4장이고 유배시절의 시가 11편 30장이고 해배 이후의 시가 3편 5장이다. 이 중 몇 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猗蘭 美友人也


곧고 고운 난초가            蘭兮猗兮

산비탈에 자라네             生彼中陂

아름다운 벗님네             友兮洵美

덕을 지켜 반듯하네          秉德不頗

좋은 딴 벗 없으랴만         豈無他好

그대 생각 많고 많네         念子實多


곧고 고운 난초가            蘭兮猗兮

저 언덕에 자라네            生彼中丘

지금 세상 보통 사람         凡今之人

빨리도 변하도다             不其疾渝

그대 생각 잊지 못해         念子不忘

속마음 안절부절             中心是猶


곧고 고운 난초가            蘭兮猗兮

쑥대밭에 자라네             生彼蓬蒿

가라지 우거져도             莠兮蓊兮

                          (新朝鮮社本에는 莠가 萎로 되어 있음)

그 누가 김매주리            誰其薅兮

그대 생각 잊지 못해         念子不忘

속마음 애가 타네            中心是勞

                         猗蘭三章 章六句


ꡔ여유당전서ꡕ에 보이는 최초의 四言詩로 1796년(35세)의 작품이다. 分章複句의 형태를 취하여 ꡔ시경ꡕ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시의 주제는 제목에 나와 있는 대로 벗을 찬미하는 내용인데 다산이 찬미하는 벗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1974년 말, 중국인 神父 周文謨의 밀입국으로 많은 南人學者들이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수난을 겪었는데 다산도 1795년 7월 金井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이 시는 이 때 죄 없이 수난을 겪은 친구들을 위하여 쓴 시로 추정된다. 더 구체적으로는 1795년 충주목사로 좌천된 李家煥 쯤으로 추정된다.

벗을 “곧고 고운” 난초에 비유하고 있다. 1장에서는 난초처럼 곧고 고운 벗이 德을 지켜 반듯하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좋은 벗이 많지만 그대를 특히 생각한다는 것이다. 1장에서 난초가 “산비탈(陂)”에서 자란다고 했는데 2장에서는 “언덕(丘)”에서 자란다고 했다. 언덕은 산비탈보다 더 높은 곳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자질을 가진 벗이 성장하여 사회로 진출했음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름답지 못하고 곧지 못한 凡人들이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은 德을 지키지 못하고 쉽게 변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벗이 이들로부터 해를 입지 않을까 “속마음이 안절부절”하다. 1장에서 “그대 생각 많고 많네(念子實多)”라 하여 다른 벗보다 그대를 더 그리워함을 나타내었는데 2장에서는 “그대 생각 잊지 못한다(念子不忘)”라 하여 벗을 염려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속마음이 안절부절” 하다고 했다. 3장에서는 난초가 쑥대밭에서 자란다고 했다. 벗이 더 험한 환경에 처한 것이다. 가라지가 우거져 난초를 해치는 데도 김매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속마음 애가 탄다”

이 시를 쓸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과 그 대상인 벗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벗에 대한 다산의 깊은 우정을 읽을 수 있다. 이 시야말로 그가 아들에게 준 편지에서 말한바 “詩三百은 모두 忠臣, 孝子, 烈婦, 良友의 惻怛忠厚한 마음의 발로이다”라는 言述에 걸맞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이 경우에는 “良友”의 思無邪한 惻怛忠厚한 마음의 발로이다.

다산이 벗에 대한 惻怛忠厚한 심경을 표현하기 위해서 四言詩의 형식을 택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우선 四言詩는 그 속성상 화려한 기교나 수식을 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忠厚한 마음을 粉飾없이 그대로 들어내는 데에는 四言詩만한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또한 “蘭兮猗兮”를 반복함으로써 벗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分章形式을 통하여 詩想을 점층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蘭”, “蓬蒿”, “莠” 등의 비유를 동원함으로써 자신의 정서를 直敍하지 않고도 큰 울림을 주는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ꡔ시경ꡕ체의 四言詩가 갖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다산의 四言詩 16편 39장 중 11편 30장이 유배시절에 씌어진 것이다. 강진에서 “내가 요사이 생각해보니 뜻을 표현하고 품은 생각을 읊는 데에는 四言만한 것이 없다”고 한 말에서도 유배생활과 四言詩의 상관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808년 두 아들에게 준 家誡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ꡔ시경ꡕ 三百篇은 모두 聖賢들이 뜻을 잃고 시대를 근심한 작품이다. 그러므로 시에는 感慨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은미하고 완곡하게 표현해야지 얄팍하게 드러나게 해서는 안 된다.


詩三百 皆賢聖失意憂時之作 故詩要有感慨 然極須微婉 不可淺露(ꡔ여유당전서ꡕ 1 378면, 「又示二子家誡」)


여기서 聖賢이란 꼭히 孔子, 孟子와 같은 성현을 가리킨다기보다 앞에서 말한 賢人君子 즉 忠臣, 孝子, 烈婦, 良友의 부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현인군자가 뜻을 펴지 못하고 시대를 근심하는 상황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ꡔ시경ꡕ의 정신을 본받아 四言詩를 집중적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산은 여기서 四言詩를 쓸 때 “반드시 은미하고 완곡하게 표현해야지 얄팍하게 드러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다른 글에서도 “風이란 것은 諷이다. 은미한 말에 뜻을 붙여 善을 개진하고 간사함을 막음이 風의 묘리이다”(風也者諷也 託意微言 陳善閉邪 風之妙也) (ꡔ여유당전서ꡕ 2, 461면, 「시경강의보유」 <국풍>)라 말하고 있다. 다산이 이렇게  “은미함”을 강조한 것은 ꡔ시경ꡕ의 ‘興’을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 孔穎達이 말한 바와 같이 “賦는 직설적이고 興은 은미하며 比는 드러나고 興은 숨어있다”(賦直而興微 比顯而興隱) (ꡔ毛詩正義ꡕ 권2) 그러므로 興體의 시에서는 “은미하게 숨어있는” 본뜻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다산은 그의 四言詩에서 ꡔ毛詩ꡕ의 체제를 따라 興體의 시에만 스스로 “興也”라 표기해 놓았다. 나머지는 賦이거나 比라고 볼 수 있다.


靈山 刺失職也 按察之臣 游豫匪度

勞者弗息焉


저 영산에 올라가          陟彼靈山

가시나무 베리라           言伐其榛

힘들여 농사해도           稼穡卒勞

나의 가난 모르다니        莫知我貧

진실로 저 군자는          展矣君子

나라의 신하련만           邦之臣兮

                            興也

저 영산에 올라가          陟彼靈山

바윗돌 파내리라           言鑿其石

힘들여 농사해도           稼穡卒勞

내 슬픔 모르다니          莫知我戚

진실로 저 군자는          展矣君子

나라의 장(長)이련만       邦之伯兮


저 영산에 올라가          戚彼靈山

샘물을 터리라             言疏其泉  

깃발을 휘날리며           旟旐央央

무리들 많고 많네          烝徒詵詵

진실로 저 군자는          展矣君子

왕명 두루 펴야지          侯旬侯宣 

                     靈山三章 章六句


1806년의 작품으로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개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不傷時憤俗非詩也)라는 그의 말을 詩로 실천한 것이다. 이 시는 제목에 명시된 대로, 본연의 임무를 저버리고 놀기만 일삼는 按察使를 풍자한 작품인데 詩的話者인 농민의 말을 빌어 다산 자신의 感慨를 나타내고 있다.

이 시는 다산 자신이 興으로 분류해 놓았기 때문에 “은미하게 숨어있는” 作詩者의 본뜻을 파악해야 한다. 시적화자인 “나(我)”는 3章에 걸쳐 “靈山”에 올라가 세 가지 행동을 한다. 1장에서는 가시나무를 베고 2장에서는 바윗돌을 파내고 3장에서는 샘물을 튼다. 그러므로 靈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 가지 행동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시 이해의 관건이 된다.

우선 靈山을 실재 산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영산이라는 이름으로 실재하는 산을 지칭할 수도 있고, 아니면 강진 근처의 靈巖 月出山을 靈山으로 표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신령스러운 산’ 쯤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신령스러운 산은 백성들이 올라가서 기원을 하면 응답을 하는 산이다. 그래서 “나”가 이 산에 올라가는 것이다. 1장에서는 산에 올라가서 가시나무(榛)를 벤다. 아니 가시나무를 베어버리겠다는 다짐을 한다. 아니 가시나무를 베어달라고 산신령에게 기원을 한다. 가시나무는 거친 땅에 亂生하는 쓸모없는 나무다. 바로 “힘들여 농사해도 나의 가난 모르는” 貪官汚吏를 가리킨다. 2장에서는 바윗돌(石)을 파낸다. 이 바윗돌은 백성들이 살아가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 ꡔ시경ꡕ 小雅의 「漸漸之石」을 염두에 둔 듯하다. 이 역시 탐관오리를 가리킨다. 3장에서는 샘물을 터 버리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샘물을 터서, 깃발을 휘날리며 가는 안찰사와 그 추종자들이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하겠다’로 보는 것이 가능한 한 가지 해석이다.

이 시는 “나라의 신하”이고 “나라의 장”인 안찰사가 “왕명을 두루 펴야”함에도 불구하고 직무를 방기하여 백성들을 가난하게 하는 것을 풍자한 작품이다. 그런데도 이 시는 興 특유의 비유법을 적절히 구사하여 작자의 의도를 “은미하고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기의 다산은 四言詩를 창작함으로써 溫柔敦厚의 詩敎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810년에 씌어진 「田間紀事」에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 작품은 1809년 己巳年의 대흉년에다가 관리들의 침탈까지 겹쳐 극도로 피폐해 있는 백성들의 참상을 그린 6편의 連作詩이다. 이 중에서 3章으로 구성되어 있는 「豺兮狼兮」의 마지막 장을 살펴본다.


豺兮狼兮


승냥이여, 호랑이여!             豺兮虎兮

말한들 무엇하리                不可以語

금수(禽獸) 같은 것들이야       禽兮獸兮

나무란들 무엇하리              不可以詬

부모가 있다지만                亦有父母

믿을 수 없어                   不可以恃

달려가 호소해도                薄言往愬

들은 체도 하지 않네            褎如充耳

우리의 논밭을 바라보아라       視我田疇

얼마나 크나큰 참상이더냐       亦孔之慘

이리저리 유랑타가              流兮轉兮

시궁창 메우는데                塡于坑坎

아버지 어머니는                父兮母兮

고량진미 즐기면서              粱肉是啖

사랑방에 기생 두어             房有妓女

연꽃 같은 얼굴이네             顔如䓿萏


“금수 같은 것들”은 백성들을 토색질하는 아전을 가리키고 “부모”는 사또 또는 그 이상의 관리를 가리킨다. 이 시는 “극히 은미하고 완곡하게 표현해서” “얄팍하게 드러나지 않게”하는 興體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산의 분노가 표면에 드러나 있다. 사또를 비록 “부모”라 부르고 있지만, 백성의 부모노릇을 해야 할 사또가 백성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好衣好食하고 있는 것을 신랄하게 비꼬는 표현이다. 「田間紀事」 6편의 四言詩가 모두 흉년의 참상을 直敍한 것들이어서 결코 溫柔敦厚하다고 할 수 없다. 아마 “은미하고 완곡하게” 표현하기에는 현실의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다산은 은미하고 완곡하게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사언시 대신에 古詩體의 寓話詩를 많이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4.


다산이 남긴 16편의 四言詩는 2500여 수에 달하는 그의 전체 詩作品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많은 양이라 할 수 없다. “寫志詠懷 莫如四言”이라 말하며 아들들에게 “須作四言”하라고 당부했던 그가 왜 지속적으로 사언시를 짓지 않았는가?

“莫如四言”이라고 한 다산의 말을 일종의 宣言的 진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二言→四言→五言→七言으로 변화한 중국시의 史的 展開過程은 그 자체가 詩形式의 발전이다. 사회의 발전에 따라 어휘가 증가하고 語法이 복잡해지면서 시의 형식도 2언에서 4언으로, 4언에서 5․7언으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漢代 이후에는 4언시가 거의 창작되지 않고, 銘文이나 贊․頌에만 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다산의 경우, 19세기에 살면서 기원전 11세기~6세기에 창작된 詩形式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이렇게 2000여 년 전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많은 양의 시를 지을 수도 없으려니와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산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언시 지을 것을 강조한 것은, “충신, 효자, 열부, 양우의 惻怛忠厚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과 같은 그런 시를 써야한다는 선언적 闡明이다.

다산이 4언시를 많이 짓지 않았으면서도 4언시를 강조한 또 하나의 이유는, 5․7언 近體詩의 지나친 형식주의를 경계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4언시는 5․7언시에 비하여 글자 수가 적은 만큼 修飾과 彫琢의 여지 또한 적다. 그리고 까다로운 聲律이나 句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시인의 사상과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씌어진 시가 건강한 시라 생각한 것이다.

결국 다산은 4언시를 통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시의 본질과 효용을 ꡔ시경ꡕ의 권위를 빌어 선언적으로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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