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1에 대한 論評]이태호, 「조선후기에 ‘카메라 옵스큐라’로 초상화를 그렸다」
[논문1에 대한 論評]이태호, 「조선후기에 ‘카메라 옵스큐라’로 초상화를 그렸다」
  • 강진신문
  • 승인 2004.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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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진 (명지학원 사진박물관 개설추진본부장)

‘조선 후기에 카메라 옵스큐라로 초상화를 그렸다’는 제목의 이태호 교수 발표는 카메라 옵스큐라와 회화와의 관련해 일반의 많은 관심이 점증되는 요즘에, 조선 후기의 초상화와 관련된 내용을 제시해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한국사진사에서 칠실파려안의 분야에 회화 쪽의 풍부한 자료 제시와 연구는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질의자가 1978년 무렵에 칠실파려안에 대한 글을 발표할 때만 해도, 다산과 복암 등이 실험했던 칠실파려안에 대해 글을 발표할 무렵에는 회화 쪽의 연구뿐만 아니라, 이 분야에 선행 연구가 전무해, 특히 이웃한 근대미술사 연구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이 번 이태호 교수의 발표는 근대미술사뿐만 아니라 한국사진사에도 풍부한 자료 제공과 중요한 연구 업적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묻는 것으로 질의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1. 이 교수께서는 “정약용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실험하고 ‘칠실관화설’을 쓴 시기는 결혼하여 서울로 이사 온 1776년 이후일 것이다. 그리고 1792년 겨울에 서학저술과 관련한 ‘起重圖說’ 등을 쓴 것을 근거로 하여, ‘靉靆出火圖說’ 이나 ‘지구도설’ 등과 함께 ‘칠실관화설’을 1792년 이전 작으로 편년하기도 한다. 이기양 묘지명에 밝혀진 대로 ‘칠실파려안’, 곧 카메라 옵스큐라를 설치하고 이기양이 초상화를 그린 시기도 정약용이 ‘칠실관화설’을 실험한 때와 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위 두 편의 글에 기술된 카메라 옵스큐라의 사용은 1776년에서 1792년 사이에 이루어졌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 칠실관화설에 등장하는 카메라 옵스큐라는, 그 글의 내용으로 봐서 초기의 카메라 옵스큐라, 즉 집에 있는 한 방의 창을 모두 닫아 컴컴하게 한 후에 조그만 구멍을 내고 그 구멍에 애체를 장치한 초기 카메라 옵스큐라 구조였던 점과

○ 복암의 묘지명에 등장하는 카메라 옵스큐라는 건물 방을 이용한 붙박이 구조가 아니라, 정약전의 집에 칠실파려안을 설치하였다는 내용처럼, 휴대용 또는 이동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춘 도구였다면

○ 칠실관화설 기술 연대와 복암의 묘지명에 언급된 카메라 옵스큐라로 초상화를 그린 시기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발전 과정을 감안 한다면 동일한 시기로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2. 또 하나 복암 묘지명에 나타난 카메라 옵스큐라 사용 시기와 관련하여, 1776년에서 1792년 사이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했지만,

○ 복암이 1799년(종조 23년) 사신으로 북경에 갔다가 박면교거(剝棉攪車)도 구입하면서 카메라 옵스큐라 일체도 같이 구입해 가져온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복암은 다산의 형 정약전씨 집에 카메라 옵스큐라를 설치하고, 친지들에게 이 도구를 소개하면서 포즈를 취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 당시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시중의 목수에게 의뢰해 만들 수도 있지만, 중요한 몇 가지 부품, 오늘의 카메라에 장치된 파인더처럼, 애체를 통해 영상이 맺히는 젖빛 유리판(상당히 컸을 것으로 생각되는데)을 국내에서 구할 수 있었는지, 또 애체, 즉 볼록렌즈의 구입 등,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구조를 요구하는 설계를 어떻게 해결 했는지 등을 감안한다면, 자체 제작보다는 중국을 통해 수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마는.

3. 초상화 재작에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론되는 화가로, 정약용과 동시대를 살았던 李命基(1756~?)을 거론했는데, ‘뚜렷한 입체감’, ‘정치한 필치의 핍진하는 실재감’, ‘투시도법에 따른 시각 적용’ 등을 그 이유로 들었습니다.

○ 이에 대해, 질의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이명기 뿐만 아니라 당시의 화가들 중에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해 직접 초상화를 제작한 경우도 있고,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도구가 만들어내는 특수효과를 수용해 이를 활용하거나, 아니면 카메라 옵스큐라로 피사체를 관찰하면서 초벌 그림을 그릴 경우 등 카메라 옵스큐라의 여러 가지 효과를 활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명기는 이러한 여건의 어느 부분을 활용했으며, 위의 여러 효과를 활용한 화가 중에 이명기 외에 또 다른 예는 없을까요?


4. 끝으로, 다산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라고 해서, 오늘의 카메라를 대신하는 명칭으로 사용해도, 의미에서, 기능면에서, 명칭 면에서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다산의 조어 실력을 발휘한 명칭으로, 사진계에서는 받아들려 이를 시용하는 계층이 많은데, 미술사학계나  다산학 연구 분야에서도 카메라 옵스큐라가 아니라 칠실파려안으로 대신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보통어가 되도록 적극 나서 줄 수는 없을는지요.

칠실파려안은 오늘의 카메라라는 명칭보다 더 우리답고, 카메라의 구조나 역할 등을 십분 감안해, 적시한 명칭이라는 점에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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