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향미술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결성을 제의한다
완향미술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결성을 제의한다
  • 강진신문
  • 승인 2004.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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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석 -사랑하는 고향사람들에게-
▲ 정문석 시인

 강진신문 7월 5일자에 게재된 「섭섭하고 야속합니다」「琴書堂」기사를 읽고서 나는 많이 착잡하고 심란했습니다.   올 여름은 「琴書堂」 기사 때문에 더 덥고 더 답답하고 더 서글프고 잠 못 이루는 무더운 한 여름밤이 되고 말았습니다.
 

완향 화백 미망인이 130여점에 달하는 유작을 지역사회에 기증의사를 밝혔는데도 아직도 군에서는 어인일인지 가타부타 일언반구도 없이 묵묵부답인 모양입니다.  또 7월 26일자 강진신문에는 琴書堂 보전대책이 시급하다는 것과 낡고 비가 새서 서까래가 내려 앉아 가는 사진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강진 교육청에서는 강진 신교육의 탯줄인 첫 산실 琴書堂이 황폐화되어 간다는데 이리도 남의 집 불구경하듯 무사태평 관심 없이 마냥 외면만 해도 되는지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만일의 경우 琴書堂이 더 퇴락해서 무너지기라도 해서 폐가가 된다면 먼 훗날 원성이 될 것이며 강진 사람들의 자존심은 대단한 상처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유구한 세월을 琴書堂이 이 정도나마 보존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완향이라는 순수 무구한 예술가가 주인으로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사실 완향화백하면 한국중앙 화단에서는 별로 유명세가 없는 화가입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인 예술계도 시중의 난장과 똑 같아서 파나 편이나 만들고 위세를 부리기 마련인데, 완향같이 천민 자본주의 비법을 잘 모르는 등신불은 뒤쳐지고 낙오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오랜 날을 촌락에서 은둔자처럼 묻혀 살아가면서, 다만 돈도 명예도 집안도 직업도 튼튼하지 못하면서, 화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외곬으로 단순하게 무명성을 이겨 나간 것입니다.
 

완향의 작품 세계는 아마추얼리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사에 때묻지 않는 청신함과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이 무기교적이고 탈이념적입니다. 그러나 완향 작품을 강진지역에서만은 세속적인 예술 평가를 떠나서 우리 고장 사람들이 사랑하고 아끼어야할 군 문화재(?)로 대우 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완향의 그림은 강진의 풍물시요 전원시요 탐진 농어촌의 민중시요 자연의 서정시이기 때문입니다.
 

완향의 그림은 사실적이고 담백하고 소박하고 무기교적입니다. 정일한 관조와 다소 고전적인 격조가 있지만 차분하고 따뜻해서 작품마다 자연에 탐입해서 고향의 포근한 숨결을 느끼게 합니다. 정물이나 인물화나 나부(裸婦)나 제자의 누드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완향의 본령은 고향 풍물과 산수와 자연을 담은 풍경화 산수화인 것입니다.
 

오늘날과는 달리 완향이 그림을 시작했던 시절만 해도 화가의 길은 천행의 행로였습니다. 그러나 완향은 그림 때문에 행복했고 그림 때문에 부자였고 그림 때문에 가난했고 그림 때문에 고달팠지만 그림 때문에 최소한도 강진에서 자존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틀림없이 군 문화재(?)가 될 완향 작품을 흔쾌히 지켜 주지 못하는 강진 사람들의 협소함이 못마땅합니다.

나는 몇 년 전에 박수근 화가의 고향인 양구에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문인 일행을 안내하는 군청 문화관광과장이 머잖아 양구에 「박수근 기념관」이 세워질 것이라 했습니다. 밀레」의 만종을 보고서는 ‘하느님, 저도 이런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 기도했다는 것과, 도청 임시 서기로, 미군 부대 초상화가로, 극장 간판쟁이로 심지어 부두 노동자로 전전하면서도 죽기까지 손에서 화필을 놓지 않았던 것이나, 기대를 가지고 출품한 관전에 입선마저 하지 못하고 낙방하기도 하고, 어린 아들의 죽음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던 것도 완향 인생과 어쩌면 그리도 엇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초등학교 졸업장 밖에 없는 이 화가는 가장 한국적인 화가의 한사람으로 양구 읍내에 기념 공원이 세워지고 기념관 및 생가 복원 사업까지 추진된다고 하니 완향의 예술 인생도 살아서는 눈물겨웠지만 언제인가 그런 축복의 꽃사태가 터지는 날이 있을 것이라 기대해 봅니다.

 내가 생각하기로 영랑 생가와 琴書堂 아름다운 산책로는 천만금을 주고도 개발하지 못할 강진 문화 관광 상품입니다. 나는 지난 날 젊은 시절부터 영랑   생가에서 푸른 대삽밭이 출렁이는 琴書堂까지의 샛길을 즐겨 산책하는 문청시절이 있었습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 주오/월출산에 달 뜨거든 날 불러 주오'국민가곡 작사자 고 김민부 시인이 나의 서라벌 예대 문창과 동창인데 부산에서 나를 찾아 강진까지 왔습니다. 두 사람 다 속창아지가 없어 밤새도록 술을 퍼 마시고, 다음날 아침에 시장통 샛골집에서 반지락 해장술을 한잔씩 하고 마땅히 갈 곳도 없어서 영랑 생가를 구경시켜 주고 양무정까지 샛길을 가는데 그렇게 좋아라 감탄하는 것입니다.

김민부 시인의 그 음험한 혼혈의 간장빛 같은 눈길로 구강포 반짝이는 은물결을 보면서 탄성을 연발하는 것입니다. 이 천재 시인은 신이 질투해서 일찍이 요절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돌아 오지 않는」서른 한 살의 불꽃 술꽃 꽃불로 「달이 오르면 배가 곯아/배가 곯으면 바위는 말이 없네」자작시를 읊조리며 신 들린 듯 건들건들 너스레를 떨던 이 괴짜시인의 혜안은 틀림 없을 것입니다. 이 오솔길이 언제인가 강진을 먹여 살릴 것이네 하던 말을 ―.
  또한 완향 화백이 병중이었을 때 시집 출판에 원판 필름을 부탁하러 琴書堂에 갔을 때 거동이 불편함에도 마당까지 나와서 만덕산과 금사봉을 그윽히 보면서 저 연인들과 헤어질 날도 멀지 않았다고 쓸쓸해 하시던 황혼의 모습도 어제인 듯 서언합니다.

 사랑하는 강진 사람들이여.
강진의 하늘과 물빛, 그리고 강진의 시와 청자, 푸른 수분이 넘치는 강진 사람들이 강진 산천을 죽도록 사랑한 한 불우했던 화가에게 미술관 하나쯤 선사하는데 인색해야 되겠습니까.
  나라 경제가 어려운 때에, 저마다 살기도 뼈속 빠지는 현실인데, 외람되이 난감한 제안을 한 것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琴書堂 보존 보수와 완향 미술 기념관」건립 추진회를 결성할 것을, 강진신문 지면을 통하여 강진 군민 및 출향인에게 정식으로 제안합니다.
  모란이 피고 지는 남촌 내 고향, 퍼런 강물이 평화 같이 흐르는 꿈의 내 고향, 설한풍에도 백련사와 함께 불타는 동백꽃, 북산 「소낭구」에 이른 아침 산까치가 좋은 소식을 전해 줄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의 행운과 건강을 빕니다.
                                              2004. 8월 15일
                                            

                                                                                               가평 백림재에서

 


◆정문석 시인은 강진에서 출생해 강진농고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수학했으며 월간 한국시를 통해 등단했습니다. 그동안 사랑하는 사람들, 방랑농부등 많은 시집을 발간했으며, 현재 경기도 가평에서 침거 집필중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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