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도암 선장마을
[110]도암 선장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4.06.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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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찌는 듯한 날씨에 신록은 제 빛깔을 찾아간다. 이른 모내기를 끝낸 들녘에선 벼들이 어느덧 포기를 더해가고 아직 모를 심지 않은 논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주민들이 막바지 모내기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물이 가득한 논에 뿌리를 잡고 노랗게 올라온 모가 갓난아이 배냇머리처럼 사랑스럽다. 

도암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난 비포장도로를 타고 올라가다 언덕 모퉁이를 돌아 나오니 야산에 둘러싸인 마을이 살포시 모습을 나타낸다. 예전에는 교통이 불편해 오지마을로 통했을 것같은 선장마을이다.

면소재지에서 불과 2㎞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선장마을이지만 마을에 들어서면 산골동네같은 느낌을 받는다. 선장마을은 서쪽으로 범재와 삼사골이 있고 동북쪽으로는 너박골이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 뒤로는 서당골이, 마을 앞으로는 초분골이 감싸 안은 듯 둘러싸고 있다. 마을은 1반인 선장과 6가구 정도 거주했던 2반인 안태로 이루어지다 지난 70년대 안태에 살던 주민들이 선장으로 모두 옮겨와 선장마을로 통합되었다.

300여년 전 창녕조씨가 처음 입향한 것으로 알려진 선장마을은 현재 11가구 17명의 주민들이 오붓한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마을에는 주민들이 정겹게 부르는 지명이 많다. 마을에서 면소재지로 넘어가는 고개인 안태 잔등, 항촌마을과 경계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범재, 과거에 아이들이 죽으면 묻었다고 전해지는 초분골, 표장마을 사이의 들로 왁새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불리는 왁사머리, 넓은 바위가 깔려있는 골짜기를 일컫는 너박골, 마을에서 성자동이나 석천마을의 석문사 등지로 갈 때 이용하는 길로 산등성이를 비스듬히 가야하기 때문에 붙여진 빗가리재, 마을에서 북쪽에 위치한 옛 절터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기왓장과 우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불당골 등의 명칭이 주민들의 입에서 불리고 있다.

마을을 찾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허름한 마을회관에 큼지막하게 붙어있는 ‘범죄없는 마을’이란 현판이었다. 선장마을은 지난 95년부터 2년 연속 범죄없는 마을로 선정될 정도로 주민들이 한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는 것이 김성근(64)이장의 설명이다. 김이장은 “주민들 대부분이 마을에 있는 교회에 다니는 교인으로 어느 마을보다 화합이 잘되고 정이 넘친다”며 “모두가 한 가족같이 서로 돕고 사니 사소한 다툼이나 범죄는 당연히 없을 수 밖에 없다”고 마을 자랑을 했다.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조중환(72)씨로부터 마을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선장마을은 신선의 손바닥 형국으로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골짜기가 형성돼 있고 맑은 물이 흘러 산수좋은 마을이라는 것이다. 조씨는 “마을 뒤 서당골에 있는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상수원을 만들어 이용하고 있다”며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이끼가 끼지 않을 정도로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흘러내려 물맛 또한 일품”이라고 말했다.

선장마을의 자랑거리는 마을에 위치한 학장교회다. 지난 1907년 선장마을로 전도사업을 펼치기 위해 안태에 세워진 학장교회는 광복 이후 주민들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교회를 설립하면서 주민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차량은 교통이 불편한 마을에서 면소재지를 왕래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위주의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는 선장마을 주민들은 자식들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어려운 생활에도 대부분의 자식들을 고등학교 이상 진학시키는 교육열은 인근 마을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 주민들은 자식들이 잘되기만을 바라는 심정으로 힘든 농사일을 묵묵히 해나간 것이다. 또 높은 교육열 때문에 마을 규모에 비해 공무원이 많은 동네로 유명했다.

마을에는 귀신나무 얘기가 내려오고 있다. 마을에 흉사가 생기면 뒷산에 있는 귀신

나무에  까마귀가 앉아 울어대며 흉사를 미리 알려줬다는 것. 주민들은 이 나무가 수십년이 지나도 크기가 변하지 않고 나무에 피해를 주면 귀신이 오른다고 해서 귀신나무로 믿어오고 있다. 
선장마을 주민들은 바라는 것이 있다. 30여년을 넘겨 낡고 흉물로 변해버린 마을 회관이 새로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현재 회관은 시설이 낡아 회관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비품 보관창고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선장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인 안태 잔등에서는 고개를 깎아 도로를 확장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예전에는 도로 폭이 넓지 않아 군내버스가 다닐 수 없을 정도여서 주민들은 걸어서 면소재지를 왕래해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시작된 공사가 완공되면 주민들의 불편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선장마을 출신으로는 중앙정보부 이사관을 지낸 조경환씨, 서울에서 변호사로 있는 조석현씨, 약학박사인 조영현씨, 목포 유달초등학교 교감을 지낸 조규찬씨, 도암 동초등학교 교감으로 퇴직한 조규홍씨, 강원도청 과장을 지낸 조충환씨, 목포 MBC 기술국장을 지낸 조정현씨, 목포해양대 교수로 있는 조학현씨, 여수 MBC에서 근무하는 조가현씨, 대한항공 김해공항에서 근무하는 조규광씨, 도암 예비군 중대장을 지낸 조규훈씨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이숙자(70)씨

끝물 모내기가 한창인 들녘에서 피를 뽑고 있던 이숙자(여·70)씨를 만났다. 이씨는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몇해전부터 직파로 농사를 짓고 있다”며  “지난달 중순께 논에 볍씨를 뿌린 후 거름을 주고 제초제를 한번 사용했는데도 피가 많이 자라 걱정”이라고 말했다. 또 이씨는 “광주에서 개인택시를 하고 있는 큰아들이 매주 한번씩 내려와 농사일을 돕고 있다”며 “피가 많이 서면 다음주에 큰아들과 함께 제초제를 한번 더 뿌려야 할 것같다”고 덧붙였다.

해남 신기에서 시집와 마을에서 신기댁으로 통한다는 이씨는 “처음 시집왔을 땐 이런 산골마을에서 어떻게 사나하는 걱정도 들었다”며 “이제는 주민들과 함께 부대끼며 사는 이곳이 마음편해 자식들이 같이 살자고 해도 마다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씨는 “이사나간 주민들이 마을을 잊지 못해 전화연락을 계속할 정도로 마을 크기는 작지만 정이 넘치는 곳”이라며 “농한기에는 주민들과 관광도 함께 다니며 재미있게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마을주민들에 대해 이씨는 “우리 마을은 예전에 창녕조씨 자자일촌 마을이었다”며 “아짐, 동서, 아제 등 대부분 친인척으로 연결돼 있어 서로 돕고 사는 것이 남다르다”고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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