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거미에게 기다림의 지혜를 배운다.
[다산로]거미에게 기다림의 지혜를 배운다.
  • 강진신문
  • 승인 2019.03.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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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권 수필가

간밤에 이슬비가 촉촉이 내렸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에 촘촘하게 엮어놓은 거미줄에 작은 물방울이 뒤엉켜 출렁거린다. 가슴 밑바닥에 깔려있던 심술이 차올랐다. 손가락 끝으로 거미줄을 건드리자 자전거 바퀴살 모양의 줄에 엉켜있던 물방울이 우수수 떨어진다.

순간 환경 적응 능력이 탁월한 거미는 해코지 기미를 알아차리고 죽은 듯이 꼼짝하지 않고 있다.
밀림에 서식하는 왕거미는 침입자에게 강한 독을 뿜어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지만 일반 거미는 자연과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보다 이로움이 많다.

해마다 거미가 먹잇감으로 잡아 치우는 해충은 화학약품을 사용해 박멸하는 벌레의 양보다 더 많다고 한다. 해충의 개체 량이 줄면 살충제 사용량이 줄어 우리의 식탁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고마운 곤충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미를 보면 뱀이나 바퀴벌레와 같이 혐오스럽게 생각한다. 눈에 거미줄이 보이면 빗자루로 싹싹 쓸어내고 땅 위에 떨어진 몸통을 발로 문질러 버려야만 성이 풀린다.

거미는 인간의 야박한 습성을 잘 알기에 인기척이 있으면 잽싸게 줄로 몸을 감고 위기를 모면한다. 자신의 분수를 망각하고 경거망동하게 달려들다 짓밟혀 죽는 사마귀나 울음소리를 참지 못하고 천적에게 잡혀 먹히는 베짱이와는 사뭇 다르다.

거미는 자연현상과 지형지물을 이용할 줄 알아서 바람과 햇볕이 통과하는 방향에 따라 곤충이 통행하는 길목에 줄을 친다. 거미는 자기 몸통 길이의 몇 배가 넘는 기다란 다리로 줄을 움켜쥐고 허공에 매달려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는다.

꽃향기에 취해 비틀거리던 나비와 마실 나온 잠자리가 걸려들면 속절없이 희생 제물이 된다. 신축성이 뛰어난 거미줄은 거센 바람에도 흔들릴 뿐 끊어지지 않는다. 침입자의 습격을 받아 줄이 걷혀지면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잽싸게 보수하거나 새로 짓는다.

거미는 먹잇감을 사냥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기다린다. 사방에 구멍이 송송 뚫린 집에서 혹독한 비바람을 맞아가며 웅크리고 있는 거미는 최대 3개월 동안 먹이를 먹지 않고 생존할 수 있다고 한다.
때로는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큰 곤충이나 조류가 걸려들면 힘이 빠지도록 몇날 며칠을 기다린다.

먹잇감이 발버둥 치다 거미줄을 뚫고 탈출할 기미가 보이면 민첩하게 달려들어 독침을 놓아 기절 시키고 끈적끈적한 액체를 뿜어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밝은 곳보다 어두컴컴하거나 그을음이 잔뜩 끼어있는 곳에 줄을 치는 이유는 노리고 있는 먹잇감에게 노출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면벽구년'(面壁九年)이란 말이 있다.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구 년 동안 벽을 마주 대하고 앉아서 진리를 깨달았던 일을 이르는 말이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지만 기다림에 익숙하지 못해 속전속결하려다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두운 곳에 그물을 쳐놓고 기약 없이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는 거미에게 인내하며 기다리는 지혜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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