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다신계, 차로 맺어 대이어 온 200년 약속
[특집] 다신계, 차로 맺어 대이어 온 200년 약속
  • 강진신문
  • 승인 2018.08.2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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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선생이 고향으로 돌아가기전 강진의 차맛을 잊지못해 제자들과 다신계를 결성하게 된다. 이런 다신계가 결성된지 200주년을 맞아 역사적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전국 최초의 상업 브랜드인 백운옥판차를 만든 이한영 선생의 고손녀 이현정박사의 글을 통해 강진차에 대해 알아본다. /편집자 주

 

다산선생이 제자들과 만든 다신계의 내용이 담겨있는 '다신계절목'.

강진의 야생차는 언제부터 자생하였고, 강진 사람들은 언제부터 차를 만들어 음용하였을까?

만덕산, 보은산, 월출산 등은 차산(茶山)이라고 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며, 이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산들에서 야생차나무가 발견되고 있다.

강진차의 유래는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료에 따르면 고려시대부터 이미 차산지로 알려져 있어, 청자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한 신라말기부터 그 뿌리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이 쓴 「백운암에 이르러(到白雲庵)」에는 '차 달이는 향기는 돌길 바람에 전해온다.(煮茗香傳石徑風)'라는 구절이 있다. 이 시는 1205년 가을에 혜심이 강진 월출산 아래 백운암(白雲庵)에 머물고 있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智訥, 1158-1210)을 만나러 오는 길에 노래한 시다.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진각국사비명(眞覺國師碑銘)에 전해지며,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남사지(月南寺地)에 현존하는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에 1, 2구가 실려 있다.

강진의 차는 조선시대에도 꾸준히 왕에게 진상되었음을 당시 편찬된 지리지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 토공조에 '작설차(雀舌茶)'로 기록된 것을 비롯하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고사촬요(故事撮要)』(1613),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76), 『여지도서(輿地圖書)』(1770), 『대동지지(大東地志)』(1864), 『조선팔도기요(朝鮮八道紀要)』(1891)등에서 강진을 차산지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조선 초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고려시대를 기준으로 차산지를 기록하고 있어 그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후기 학승(學僧) 범해각안(梵海覺岸, 1820-1896)은 「차가(茶歌)」에서 '강진 해남에서 만든 것은 서울까지 알려졌네(康海製作北京啓) 월출산서 나온 것은 신의 막힘 일 없다네(月出出來阻信輕)'라고 강진의 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진 강진차는 1801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강진으로 유배 오면서 차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유배 오기 전부터 차를 마셔오던 다산은 우연히 만덕산 백련사를 방문하였다가 주변에 야생차가 자라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강진유배 초기에는 백련사 혜장스님에게 차를 얻어 마시다 초당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는 제자들과  직접 차를 제다하여 마셨다. 다산이 직접 차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은 1814년 3월 4일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 1772-1839)와 주고받은 「이산창수첩(二山唱酬帖)」의 차시(茶詩)를 통해서이다. '곡우 지나 새차가 비로소 기를 펴자(雨後新茶始展旗) 차바구니 차 맷돌을 조금씩 정돈한다. (茶篝茶碾漸修治)'라는 구절에서 다산이 찻잎을 따기 위한 바구니와 제다를 위한 차 맷돌을 정리하며 스스로 차를 만들 준비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산이 초당시절 제자들과 함께 만든 차의 양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1810년 동짓날에 쓴 편지의 내용 중에 '다만 좋은 차 수백 근을 쌓아두고 다른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니 부자라  할 만 하지요. (唯蓄佳茗數百觔 以索人求可謂富矣)'라는 대목이 있다.

생 찻잎이 제다공정을 거쳐 음용 가능한 차로 완성되면 무게는 1/4에서 많게는 1/5로 줄어든다. 즉 백 근은 60kg이므로 백 근의 완성된 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생 찻잎이 최소한 240kg이 필요하다.

강진차의 유래를 담은 진각국사비.

따라서 다산의 편지 내용대로 수 백 근의 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찻잎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를 두고 수백 근을 쌓아두었다고 표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오백 근이라고 추정하였을 때 필요한 찻잎은 최소 1.2톤이다. 찻잎이 충분히 공급될 수 있는 다원과 채엽에서 제다에 이르기까지 충당 가능한 노동력이 뒷받침이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는 다산 초당 주변에 많은 양의 야생차가 자라고 있었으며, 제자들은 모두 채엽과 제다에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제다 기술에 모두 능통하였음을 방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조선 후기 강진사람들의 제다 기술이 높은 경지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18년 동안의 강진 유배생활을 마치고 해배되어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로 돌아가면서 제자들과 다신계(茶信契)를 맺는다. 다신계는 스승과 제자가 차로 맺은 계로서 이는 우리나라 역사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어렵다. 다산과 제자들은 1818년 8월 그믐날 다신계의 취지와 참가자 명단, 그리고 약조 등을 담은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을 작성하였다. 그 중 차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穀雨之日 取嫩茶 焙作一斤 立夏之前 取晩茶 作餠二斤 右葉茶一斤 餠茶二斤 與詩札同付
곡우날 어린차를 따서 낮은 불에 덖어 1근을 만들고, 입하 전 늦차를 따서 떡차 2근을 만든다. 엽차 1근, 떡차 2근을 시와 편지와 함께 부친다.

採茶之役 各人分數自備 而其不自備者 以錢五分給信東 命雇橘洞村兒 採茶充數
차를 채취하는 일은 각자가 맡은 양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은 돈 5푼을 신동에게 주어서 귤동 마을의 아이를 고용해서 차를 채취해 수효를 채우게 한다.


다산은 자신이 떠난 뒤에도 제자들이 글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기를 바랐다. 또한 자신의 차벽(茶癖)을 충당해줄 차의 공급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다신계를 맺어 제자들의 공부를 독려함과 동시에 차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고자 하였다.

다신계의 언약은 그 후 강진의 선비들에 의해 100년 이상 지켜져 왔다. 다신계가 맺어진 1818년으로부터 114년이 지난 1932년 일본인 학자 아유카이 후사노신이 다산의 고택에서 대접받은 '금릉월산차(金陵月山茶)'가 강진에서 만들어져 다산에게 보내진 차이다.

또한 1939년 이에이리 가즈오와가 기록한 이한영의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 또한 다신계의 약속을 지켜온 차였다.

스승과 맺은 약속을 100년 이상 대를 이어 지켜온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렇듯 강진의 선비들은 두터운 신의(信義)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다신계 200주년을 맞이하여 강진사람들의 유전자 속에 녹아 흐르는 선조들의 신의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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