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강진, 고려청자 제작에서 선도적 역할했다"
[특집] "강진, 고려청자 제작에서 선도적 역할했다"
  • 김철 기자
  • 승인 2018.08.1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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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학술심포지엄]
'강진 사당리요장 자기제작의 실상과 특질' 학술심포지엄 개최

왼쪽부터 신 준 원광대 교수, 김윤정 고려대 교수, 이희관 전 호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조은정 학예연구사가 토론을 하고 있다.

고려청자하면 '전남 강진'이라는 일반적인 사실을 증명하는 특별한 학술심포지엄이 지난달 30일 강진고려청자박물관 1층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이번 학술심포지엄은 대구면 강진청자박물관 내 고려청자박물관 좌측 땅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1964년부터 1970년까지 가진 발굴조사를 토대로 출간된 2015년 보고서를 중심으로 '강진 사당리요장 자기제작의 실상과 특질'이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강진군은 올해 하반기에 이 지역을 포함해 더 넓은 면적으로 전면 재발굴 조사할 계획이다. 이에 이번 심포지엄은 발굴조사의 방향과 주안점에 대해 사전검토를 위해 열린 것이다. 특히 심포지엄은 강진 청자요지와 생산방식에 대해 심도 깊게 살피기 위해 여유있는 토론시간을 배정해  진행했다.

이번 심포지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명지대학교, 충북대학교, 고려대학교 등 국내 주요 도자사 전공 학과의 석·박사 과정 학생들과 광주, 전남권 조사기관 관계자가 많이 참석하여 열띤 질의응답이 이뤄졌다. 고려청자 역사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강진 사당리 요지에 대한 심포지엄이기 때문에 강진 군민은 물론 도자사 전공자들의 질문도 이어졌다.

이희관 前 호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주제발표에서 '강진중에서도 사당리라는 지역으로 한정해 이곳의 청자가마가 고려왕실에서 필요했던 어용자기(御用瓷器)를 생산한 제양수색(製樣須色窯) 성격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즉 왕실에서 필요한 그릇의 견본이나 도본(圖本)을 강진으로 보내 제한적으로 생산하고 왕실이외의 사용을 금지하는 체제였다고 보았다.

토론자로 나선 김윤정 고려대학교 교수는 사당리내에서도 현재 고려청자박물관이 위치한 당전(堂前)마을에 있는 가마터들과 그 이외 가마터 출토유물의 성격이 상이한 점에 착안해 구분이 필요함을 제기했다.

신준 원광대학교 교수는 현재 전북 부안 유천리 청자요지 발굴조사 참여 결과를 상세히 설명하면서 앞으로 진행될 강진 청자요지 발굴조사에서의 유의할 점까지 부연설명했다.

김국현 강진고려청자박물관장은 "강진고려청자박물관이 2017년에 국가귀속문화재 보관관리 위임기관으로 지정받았기 때문에 올해 연말에는 사당리20호와 사당리33호 청자요지 발굴유물도 이관을 추진할 예정"이라며 "고려청자 연구를 위해 강진 청자요지 유물 확보 등에 계속 노력할 것이다"고 말했다.

 

사당리요장의 성격에 대한 비교사적 접근

이희관 전 호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특정 요장의 자기제작의 실상이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풍부하고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폐기물 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당리요장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사당리요지 '가'구역의 폐기물 퇴적은 고려시기의 일반적인 요지의 그것들과는 달리 거의 대부분 자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이 구역의 주위에 있던 요에서 어용자기를 소성하여 이곳으로 옮긴후 선품과정을 거쳐 낙선품들을 폐기함으로써 형성된 자편퇴적갱이나 자편퇴적구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자편퇴적은 한국과 중국 모두 당시 어용자기를 생산한 요장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이다.

사당리 '가'구역 출토자기는 종류·기종·문양·장소기법 등의 측면에서도 강진의 그 밖의 요지 출토품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즉 자기의 종류와 기종이 훨씬 다양하고 문양이 있는 자기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크게 높으며 규석을 받치고 소성한 고급자기의 비율 역시 그러하다. 이와 같은 현상 역시 이곳에서 출토된 자기가 공어용으로 제작된 것이라는 점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해석된다. 이러한 어용자기는 조정에서 제공한 견양을 토대로 제작되었으며 그 핵심적인 요는 사당리 7호, 8-2호, 23호, 27호용 등이고 사당리 41호요와 43호요 등과 같은 그 주변의 요에서도 그 일부를 생산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사당리요장에서 어용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초기청자시기의 어느 때부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당리요장의 성격에 대해서는 일찍이 그곳에서 출토된 명문자료 등을 토대로 그것이 어요였을것이라는 견해가 제출되었지만 근거가 박약한 편이다. 오히려 태안 대섬 출수 청자와 목간 등을 통하여 볼 때 사당리 요장은 공어용 자기뿐만 아니라 상품용 자기도 함께 생산한 민요였다고 판단된다. 나아가 어용자기의 제작과 공급의 측면에서 보면 송대말기의 청량사여요나 송대말기~남송초기의 건요처럼 민요의 토대위에서 운영된 제양수색요(製樣須索窯)와 비교적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강진의 요장 가운데 칠량소에 편제되어 있던 삼흥리요장을 제외한 사당리·용운리·계율리·수동리요장은 모두 대구소에 편제되어 있었다. 이들 요장의 경우 한 자기소에 편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당리요지와 그밖의 요지가 폐기물 퇴적과 출토품의 양상 등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 핵심적인 원인은 사당리요장에서 그밖의 용운리·계율리·수동리요장들과 달리 어용자기를 생산·공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말하자면 어용자기의 생산·공납 여부가 그러한 양자 사이의 차이를 야기한 주요 원인으로 믿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사당리요장과 용운리·계율리·수동리요장은 한 자기소에 편제되어 있었지만 국가에대한 부담의 내용이 서로 달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용운리·계율리·수동리요장도 자기소로 편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공납의 임무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검토를 통하여 볼 때 이들 요장에서 어용자기를 생산·공납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런데 당시 국가에서 필요한 자기는 어용자기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밖의 국용에 필요한 자기도 공납으로 충당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중앙관청이나 지방관청 수용의 자기 등이 여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요장에서는 이러한 국용의 자기를 공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이들 요장도 민요였으므로 그러한 공납용 자기뿐만 아니라 상품용 자기도 함께 생산하였을 것임은 말할나위가 없다.

한 자기소에 편제되어 있던 사당리 요장과 그밖의 요장이 서로 다른 내용의 공납을 하게 된 것이 이 요장들의 요주나 대구소의 소사를 구성하고 있는 소경들의 의도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국가가 그렇게 규정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노동력의 조달 등을 둘러싼 소민, 도공, 소경, 요주의 관계나 이러한 공납체제의 구체적인 전개과정 등도 그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밝혀진다면 우리는 강진요의 실상에 더욱 다가설 수 있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앞에 과제로 놓여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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