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강진군 도암면이다. 지명(地名)에 길 도(道)자와 바위 암(岩)자를 쓴다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인데, 화순군에도 도암면이 있는 걸 보면 그 곳도 바위산이 많이 있는 듯싶다. 우리 고장은 돌과 인연이 깊다. 70년대 바위산을 허물어 가루를 만들어 일본에 수출했으며, 대기업에서 유리 원료를 채취하느라 수십 년 동안 이곳저곳을 파헤쳐 온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었다.

도로에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지 않던 시절 신작로에 돌이 어찌나 많이 깔렸던지 겨울철 검정 고무신 끝이 돌멩이에 부딪히면 발가락이 깨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자랐다.
 
강진읍에서 완도 방면으로 55번 지방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도암면 초입에 남쪽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해발 400m정도 되는 산이 보인다. 만인에게 덕을 베푼다는 심오한 뜻을 품고 있는 만덕산(萬德山)이다. 칼날 같은 바위산 등성이를 타고 가면 남도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석문산(石門山)이 나온다.

산맥이 단절된 구간에 구름다리를 설치해 덕룡산(德龍山)과 연이어졌다. 내가 다녔던 도암 초등학교와 중학교 뒤편에 있는 합장산은 9년 내내 바라봐도 질리지 않았다. 기암괴석(奇巖怪石)이 즐비하게 펼쳐진 바위산 능선을 걷다 보면 오른편으로 해남 옥천 평야와 왼편으로 고즈넉한 해안이 보인다.
 
초등학교 시절 걸어서 두륜산을 넘어 대흥사까지 소풍을 갔다. 지난 번 추석 명절에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와 함께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가며 추억 여행을 했다. 참새 걸음으로 한나절 이상 걸어야 도착했던 길을 자동차로 순식간에 갈 수 있는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이 편리 해진 만큼 자연은 힘들어 한다. 문명이라는 연장으로 손발을 자르고 허리에 구멍을 뚫어 철심을 박아 훼손시켜도 자연은 스스로 치유해 간다. 이율배반적인 인간이 옛 모습이 그립다며 찾아오면 기꺼이 맞아주는 자연은 인간의 최고의 스승이다.
 
백련사(白蓮寺)와 다산초당이 이어진 산은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산이지만 사찰과 초당이 연결된 약 1㎞ 정도 되는 그 길을 걷는 기분은 느낌이 다르다. 평온하고 넉넉한 강진만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부드러운 산책 코스다.
 
나는 지금도 백련사보다 만덕사라는 명칭에 익숙해 있다. 대웅전으로 가는 돌담 밑에 작은 나무들이 낮선 사람을 대하듯 앙증맞게 쳐다본다. 만경루 마루 밑을 통해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돌 거북이 있다. 어린 시절 소풍 와서 거북등에 올라 흑백사진에 모습을 담았다. 그 후 반세기가 훌쩍 흘렀지만 십장생 거북은 돌 비석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서있다.
 
1970년대 다산초당과 백련사 입구에 있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아늑한 선착장에 조그만 고깃배들이 옹기종기 묶여 있고 개펄 위에서 아낙이 허리 굽혀 어패류를 캐고, 남정네는 긴 장대 끝에 낚싯줄을 매달아 짱뚱어를 잡고, 여름이면 아이들이 옷을 홀랑 벗고 멱을 감았다.
 
개펄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천 년에 걸쳐 이루어진 개펄을 억지로 막아 생태계의 보고를 농토로 만들었다. 식량이 부족해서 허덕이던 시절 주린 배는 채웠지만 파괴된 환경을 대대손손에게 물려줘야 한다.
 
사찰 주변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천 그루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겨울철에도 낙엽이 지거나 푸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 소나무· 매화나무를 일컬어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한다. 다른 식물이 모두 시든 겨울에 빨간 꽃봉오리를 피어 올리는 동백꽃을 추운 겨울에도 정답게 만날 수 있는 친구에 빗대어 세한지우(歲寒之友)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백은 가을부터 봄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나무에 피어있을 때는 피어있는 대로 땅에 떨어져 있을 때는 떨어져 있는 대로 아름답다.
 
우거진 침엽수 나뭇잎들이 뒤엉켜 햇볕을 가리고 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햇볕의 음영이 물보라처럼 번졌다. 가느다란 햇살이 두툼한 잎에 앉아 간지럼을 태우지만 지조 높은 동백나무 잎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둥근 석등 사이에서 다람쥐가 숨바꼭질 하고 있다. 날씬한 다람쥐 한 마리가 앞발을 들고 힐끗 쳐다보더니 안심해도 된다는 듯이 심드렁 숲속으로 들어간다. 짓궂었던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