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신문이 만난사람3]남미륵사 법흥스님
[강진신문이 만난사람3]남미륵사 법흥스님
  • 주희춘 기자
  • 승인 2004.05.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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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강진위해 할수 있는 모든일 하고 싶다"

▲ 남미륵사 전경
군동 풍동마을 남미륵사에 가본 사람들은 그 규모에 입을 벌리게 된다. 일주문 진입로와 경내에 빽빽히 진열된 나한상하며 수십만그루에 이르는 철쭉이 압권이다. 50평 규모의 대웅전을 비롯해 경내에 세워진 크고작은 건물이 20여채에 달해 처음 들어간 사람들은 어디가 어디인지 혼란스러운 정도다.

사람들의 관심은 여러가지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절을 지었는지, 돈을 어떻게 조달했고 얼마나 들어갔는지, 무슨 비결이 있는지... 이러한 궁금증은 여러 가지 자문자답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스님이 신이 들린 사람이라고 하더라, 점을 잘 본다고 하더라, 산속에서 요술을 부린다고 하더라, 경상도 사람들이 돈을 댄다고 하더라등 남미륵사를 두고 일어나는 소문은 절의 규모 만큼이나 다양하게 양산됐다. 그 많은 소문과 궁금증이 집약되는 곳은 단연 남미륵사 주지 법흥스님이다.

나이 49세. 풍동마을이 고향. 23년전 고향에 정착해 남미륵사 건립 시작. 현재의 직책은 남미륵사 주지이면서 세계불교미륵대종 총본산 총무원장.

기자는 지난해 가을에 이어 최근 두차례 법흥스님을 만났다. 물론 처음 관심은 갖가지 소문에 관한 것이었다. 정말 도술을 부리는지, 사람의 앞날을 꿰뚫른지, 정말 사람의 병을 고치는지등 시원스럽게 대답을 듣고 싶은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느낀 것은 스님의 묘술이 오늘의 남미륵사를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스님은 대단히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면시간이 하루 2시간이라고 했다. 식사는 아주 조금 먹지만 그것도 1년중 6개월 정도는 물로만 세끼를 해결하고 있었다. 사후세계를 믿고 있어 이상세계를 지향하고 있었지만, 장기적으로 강진학생들을 위해 장학사업을 펴는게 가장 큰 소원이라는 현실론을 강하게 피력했다. 또 자신은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지만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 만나주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고, 불사를 크게 하지만 모두 법인재산이라며 자신을 무소유자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잠시 스님의 약력을 살펴보자. 법흥스님은 14세때에 집을 나가 나주의 어떤 사찰에서 절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부터 어떤 집착적인 생활을 했는데, 한곳에 머무르지 못한채 전국의 사찰을 떠돌았다. 강원도를 거쳐 포항의 어느 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고 점을 보며 침을 놔주기도 했다. 이때 경상도 신도들이 확보됐고, 일본과 미국, 호주, 프랑스 교포들이 스님을 만나러 오기 시작했다.  

스님은 23세때 고향으로 돌아왔다. 절터를 찾아다녔는데 처음에는 장흥이나 영암에 터를 잡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강.해남이라는 말이 싫어 강진을 발전시키기 위해 고향마을에 터를 잡았다고 주장했다. 절 이름을 남미륵사라고 한 것도 미륵부처님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깨끗한 것이 강진에서 시작되길 바라는 뜻이었다고 역시 강진과 연관성을 집중 설명했다. 이쯤되면 스님은 대단한 애향론자인 셈이다.

처음에 돈을 가지고 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웅전을 짓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한 신도가 거액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 신도는 스님이 강원도에 있을때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그후로 엄청난 시주가 들어왔다. 건물도 속속 들어섰다. 1만여평의 부지에 들어서 있는 대웅전과 망경루등은 전남지역에서 찾기 어려운 규모이고, 대웅전안에 있는 와불과 백옥관음상, 천수관음상은 수십억원을 들여 모두 중국에서 들어온 불상들이다.

대웅전앞 33관음상은 모두 청동으로 조성됐고 경내에 피어있는 철쭉은 100만그루가 넘는다고 소개했다. 여기에 1년에 소모되는 쌀의 양이 800여가마에 이르고, 과일소비량도 엄청나다. 김장은 매년 10만포기를 하고 있다. 쌀을 비롯한 각종 식품은 모두 강진에서 조달한다. 스님은 지금까지 투입한 돈의 규모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엄청난 액수’라고만 답변했다.

남미륵사는 요즘 또 다른 불사를 벌여 놓고 있었다. 높이가 25m에 이르는 동양최대 청동좌불을 조성하는 것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63억의 자금중 24억원은 일본의 한 신도가 보내왔다. 청동좌불은 현재 중국에서 제작이 진행중이여서 부처님 오신날 전에 준공이 가능할 전망이다. 스님은 또 370평짜리 대웅전을 일본신도들의 도움으로 건립할 계획이다. 
규모에 너무 집착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중생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있는 것 뿐입니다. 모두 외지에서 돈가져와 하는 일이예요. 이게 누구의 재산이겠습니까?  결국은 강진의 재산입니다. 강진이 그만큼 커지는 거예요. 강진사람들이 애정을 가져주었으면 좋겠어요. 청동좌불이 들어서면 강진의 큰 관광자원이 될겁니다”

이렇듯 스님은 각종 불사가 강진이란 지역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이라고 자주 설명했다. 강진을 위해 할수 있는 모든일을 하고 싶다는 표현도 했다. 여기에는 지역사회에 대한 적지 않은 섭섭함이 베어있었다.

“나를 사이비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못 배운게 억울해요. 개인적으로 돈 모으지 않았고, 아픈사람 돈받지 않고 고쳐주고, 가난한 학생들 장학금주고 있는데 마음 아픈 비방을 합니다. 나는 나와 가족을 위해 한푼도 돈을 써본 적이 없는 사람이예요”

강진사람들이 남미륵사에 관심과 애정을 가져달라는 것이었다. 남미륵사는 이번에

청동좌불 불사가 끝나면 양로원과 납골당을 지을 계획이다. 인근 군유지를 매입해 납골당을 짓고 싶지만 군청과 협의가 진행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또 큰 규모의 장학재단을 설립해 종교와는 상관없이 열심히 공부하는 강진학생들에게 혜택을 줄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인터뷰 매듭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스님이 체험하고 있다는 어떤 특이한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은 우울증환자를 치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산신령의 계시를 받아 모든 것을 처리한다”고 스스로 설명을 하는 터였다.
“일반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지요. 저는 밤이면 뒷산 토굴에 올라가 새벽까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와 교감이 없다면 이렇게 큰 불사가 가능하겠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종교의 세계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기 마련이었다. 또 일반사람들이 느끼는 남미륵사에 대한 시각은 다양할 수 있는터다.

그러나 사람들이 남미륵사의 신앙을 어떻게 평가하든 지금 남미륵사는 보기드문 규모성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아주 작은 것도 관광자원화 해야하는 지역현실에서 강진발전에 기여할 대단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결국 지역사회에서 관심을 가지고 발전시켜야할 관광지인 것이다.

인터뷰 말미에 혹시 도움을 청하고 싶은 지역주민들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었다.
“오면 모두 고쳐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중성격이나 나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만나지 않습니다. 대신 선하게 살면서 손해를 보았거나 병을 얻은 사람은 오십시오. 지금까지 아픈사람 기도해주고 돈받아 본 적 없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고개돌려 바라보니 남미륵사 경내에 철쭉이 5월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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