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등의 세상톺아보기2
김해등의 세상톺아보기2
  • 문화부 기자
  • 승인 2004.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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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좋은 엽서

집을 방문하는 사람마다 바람이 드세단 말을 자주한다. 궁리 끝에 까치 세 마리가 집을 물고 날아가는 판화를 만들어 벽에 붙였다. 이사는 하고 싶은데 맘뿐이라는 뜻이다. 자화자찬하던 그림을 인쇄소에다 맡기고 엽서를 만들었다. 여행을 가거나 가까운 곳에 마실 나갈 때는 엽서를 꼭 챙겨간다. 산꼭대기 운무 곁에서 쓸 때도 있고, 자운영 꽃밭을 지나면서 불현듯 생각나는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엽서를 쓸 때는 버릇처럼 말을 하면서 쓴다. 그와 나의 간격이 엽서 한 장의 두께였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간혹 철딱서니 없다는 빈정거림을 들을 때가 있다. 전자우편을 두고 번거로운 짓을 왜 하느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미 엽서의 야릇한 두근거림에 매료 돼버린 걸 어찌하겠는가.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일일이 반박하지 않는다. 대신 주소를 물어서 수첩에 또박또박 적어 놓는다. 집에 가면 곧바로 엽서를 띄워 일침을 놓기 위해서다. 그리고 쉬엄쉬엄 그가 나에게 중독 될 때까지 엽서를 보내면서 기다려보는 거다.

조선중기의 한 여인의 편지가 발견되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남편이 서른 살에 요절하자 그 여인은 ‘사부곡’을 써서 관속에 함께 합장했다.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했을까요?” 편지는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부덕이고 악처의 조건이 됐던 시절이 아니던가. 400년이 지난 애절한 이 편지 앞에서 감정이 메마른 현대인은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각박한 사회일수록 조급증이 만연하다. 조급함은 간략하고 빠른 것을 쫓는다. 이런 세대의 요구를 충족해주는 것이 인터넷 문화라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지만 인간 본연의 감정은 뒷전인 채 개인주의와 사무적인 명쾌함만을 쫓는다는 것은 문제일 수밖에 없다. 편지는 쓰는 사람의 감정을 오롯하게 전해준다. 글씨에 묻어나는 표정과 체취를 느낄 뿐만 아니라, 정성을 들여 쓴 문장에서 오는 슬픔과 기쁨은 순백의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이런 편지의 쇠퇴야말로 감정박탈의 칼날 위에 서 있는 우리 현대인의 쓸쓸한 모습이다.

요즘 ‘웰빙문화’가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웰빙은 물질만능주의의 반작용으로 생겨난 새로운 문화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상업주의가 가공해 낸 정체불명의 ‘변종’일 수도 있지만 인간 상실의 쓸쓸함을 극복해 보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 의지는 정신수양에 도움이 되는 명상과 요가의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가슴을 훈훈하게 데워주는 엽서야말로 웰빙의 한 맥락이 아니겠는가. 달려가는 봄날에 몸에 좋은 엽서 한 장 받고 싶다.<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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