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다산이 돌아가자, 황상은 백적동 일속산방으로
[특집] 다산이 돌아가자, 황상은 백적동 일속산방으로
  • 강진신문
  • 승인 2017.09.08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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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만의 강진 다시보기] 황상(黃裳)의 일속산방(一粟山房) <1>

다산선생의 최고의 제자는 누구였을까 다산선생의 제자중에서 대부분 황상을 꼽는다. 지역출신으로 다산선생이 고향으로 돌아가자 선생의 가르침대로 일속산방을 짓고 생활했다. 이런 황상을 지역문화로 이끌어 내야하는 시점이다. 이 시기에 황상을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 편집자주


어떤 만남이었기에 운명이라고 했을까?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내리시면서 늘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네.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를 얻었으니 너도 하거라.

과골삼천! 두 무릎을 방바닥에 딱 붙이고 공부에만 몰두하다보니 바닥에 닿은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 추사가 먹을 갈아 벼루 여러 개를 밑창 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복사뼈에 세 번 구멍이 뚫렸다는 말은 처음이다

다산(茶山)은 황상을 숨은 진주라고 까지 극찬했으며 가장 아낀 한 사람의 제자라고 했다.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은 어떤 만남이었기에 운명이라고 했을까? 인간은 새로운 만남을 반복한다. 그토록 좋고 간결했다가 어느 날 끝에 가서 싸늘한 냉소로 남는 만남도 있고 시큰둥한 듯 오래가는 은은한 만남도 있다. 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만남을 가꾸어 가야 할까? 이제 그들은 가고 남은 자취는 역사 속에 묻히거나 생각 속에 묻혀 버리고 없다. 그래도 조용히 말한다. 이런 좋은 만남의 사람이 있었노라고! 더벅머리 소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단 한 번의 운명적인 만남 단 한 번으로 삶 자체가 업그레이드되는 만남 그런 만남을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유배 시절 황상의 삶은 그 자체가 감동적이었다. 어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지금의 눈으로가 아닌 다산의 시선으로 볼 때도 그랬으리라. 이름 없는 시골의 아들 멋진 스승과 만난 조화의 선율은 그때도 많은 사람을 열광케 했으리라. 더벅머리 소년이 스승이 내린 짧은 글 한편에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가는 과정은 대하드라마와 같다.

1801년 11월 강진에 유배 온 다산이 여유당으로 돌아간 것은 1818년 9월 15일 일이었다. 마흔에 내려와 쉰일곱의 늙은이가 되어 향리로 갔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세월이었다. 1810년 9월 큰아들 정학연은 꽹과리를 두드려 아버지의 사면을 요청해 임금에게 석방 약속을 받았다. 방해 세력이 집요한 공작으로 막상 명령서가 집행된 것은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818년 8월의 일이었다. 왕의 석방 명령을 내려도 8년씩 집행하지 않는 나라가 당시 노론이 지배하던 조선이었다. 다산은 황상에게 재빠른 천재보다 미숙한 둔재의 노력이 훨씬 더 무섭다고 일깨워 주었다.

황상은 스승의 이 말씀을 명심누골(銘心鏤骨)마음에 새기고 뼈에 아로새겼다고 했다. 그 후 60년간 스승의 이 말씀이 늘 그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이 가르침을 따라 어기지 않고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겠노라고 선언했다.

황상의 운집 '치원유고'에 공부는 밥 먹듯이 해야 하는 법이다. 쉼 쉬듯 하고 습관처럼 해야지 다산은 늘 일렀거늘 문심을 알고 혜두가 열려야 공부머리가 깬다. 머리가 깨지 않으면 백날해도 헛공부다. 소년 황상은 스승의 격려에 크게 고무되어 말씀에 따라 평생을 노력하고 노력했다.

스승이 귀양이 풀려 올라간 뒤에도 그는 세상의 눈길을 주지 않고 낮에는 농사일과 밤에는 공부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생 시골에 묻혀 살아온 농사일이었지만 세상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다산 아들 정학연 형제와 추사 등 다투어 그의 시를 칭송하고 그의 시집에 서문을 써주기도 했다. 평생 이룬 것은 보잘 것 없지만 생각해 보면 스승의 남기신 가르침은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삶의 끝자락에서 그의 남긴 이 말, 모든 사람이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다산의 역경의 세월은 자신과 이어졌을 뿐 아니라 자신감 없던 시골 소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학문의 위대함은 인간의 위대함에서 나온 것이다.

'일속산방'은 현재 옛 터만 남아 있다. 대구면 정수사 푯말을 따라 용운리 저수지를 끼고 올라가면 일속산방은 천태산 자락 당곡(堂谷)의 안쪽에 자리 잡았다. 현재는 40년 전 만들어진 당전 저수지로 인해 집터 바로 앞까지 물이 차 있다.

일속산방은 정수사 맞은편 용운리 옛 초등학교 자리 바로 뒤편에 있다. 현지에서는 허튼머리 지형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풍수지리에 따르면 옥녀산발(玉女散髮)의 형국이라고 하며 뒤쪽은 신매등이라 부르는 석벽이 둘러쳐져 있다. 옥녀가 신매등에 묻힌 아버지의 산소를 보고 머리를 풀고 호곡하는 형상이라고 설명한다.

일속산방 일휘에는 어떤 뜻이 담겼을까? 1853년 3월 20일 초의는 자신의 제자인 소치, 허련이 추사의 편지 심부름차 서울에서 내려오자 그에게 일속산방을 그리게 해서 황상에게 선물로 보냈다. 일속의 의미는 불가의 수미산과 장자의 재물론에 나오는 비유에 견 준 후 유가적으로 풀이했다. 소동파도 '적벽부'에서 이 세상에 잠깐 살다가는 인생을 아득한 바다 위에 낱알 한 톨에 견준 적이 있다. 일속산방은 좁쌀 한 톨 또는 겨자씨 한 알만큼 작아도 그 안에는 광대무변의 세계가 펼쳐진다. 방안 양편에는 제자백가의 책과 문집이 가득 늘어서 있고 그 벽에는 세계지도가 붙어있다. 북쪽은 만고송실이고, 남쪽은 일속산방이며, 서쪽은 노학암이다. 동서남북이 다 별도의 이름을 가진 작지만 운치가 있는 산방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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