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면 사당리, 최고의 청자매병 만들었다
대구면 사당리, 최고의 청자매병 만들었다
  • 김철 기자
  • 승인 2017.08.14 1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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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고려청자 학술심포지엄

2017년 고려청자 학술심포지엄... 고려시대 매병 연구의 새로운 접근

지난달 31일 고려청자박물관 1층 세미나실에서 2017년 고려청자 학술심포지엄이 주민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주제는 고려시대 매병 연구의 새로운 접근이었다.
 
심포지엄은 특별전시와 연계해 도자사 연구자들의 보다 전문적인 연구내용을 관람객들이 쉽게 알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매병은 중세시대 중국, 한국, 일본에서 각각 만들어졌다. 특히 중국은 각 지역별로 대표적인 가마터마다 제작된 매병의 특징이 뚜렷하며, 한국은 고려 12세기부터 조선 15세기까지 400여 년간 제작되면서 시기별로 특징과 변화가 구분된다.
 
발표자는 국내 신진 도자사 연구자를 중심으로 섭외했다. 총 세 가지 주제로 발표가 이어졌다. 박정민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는 '명칭과 용도를 통해 본 매병의 기원과 변천', 김세진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은 '고려시대 매병의 조형적 특징과 시기별 변화', 김태은 단국대학교 강사는 '고려시대 생산유적 출토 청자매병의 양상과 특징'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주제발표 후에는 이희관 前 호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사회를 맡고 발표자와 자유롭게 토론하는 시간으로 종합토론이 진행됐다.


명칭과 용도를 통해 본 매병의 기원과 변천 - 박정민 명지대학교


오늘날 우리는 매병을 고유명사로 사용한다. 중국은 18세기 이후부터 매병을 고유명사로 활용하기 시작했으나 우리는 그보다 훨씬 늦게 매병을 인식했다. 실제 조선초기 이후에는 매병으로 구분될만한 형태의 그릇이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명칭도 불필요했다.
 
매병이라는 이름은 매병의 본명이 아니다. 술을 담았던 그릇 준(樽)은 동아시아 사대부들이 사랑했던 매화를 만나 매병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우리는 현재 매병을 고유명사로 사용하면 그 명칭이 담고 있는 개념과 정의를 함께 인식한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매병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 이후 한(韓)·중(中)·일(日) 삼국에서 매병이 유행한 것은 당시 동아시아 사회를 아우르는 문화가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에는 청나라를 시작으로 매병이라는 명칭이 또한 공유되었다. 명칭의 공유는 인식의 공유로 연결된다. 매병은 영어로 Meiping이다. 매병은 이제 세계적으로 공통된 의미를 지니며 특정한 형태의 그릇을 지칭한다.
 
매병의 용도와 명칭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했다. 매병이 대표적이기는 하나 많은 그릇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한다. 그릇에는 음식은 물론 시간과 문화가 함께 담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릇의 변화상을 읽어내는 과정을 통해 지나간 문화와 사회를 입체적으로 이해할수 있다. 그것이 지금처럼 고려청자 매병을 주제삼아 전시하고 또 고려청자만을 위한 박물관을 만들어 함께 감상, 탐구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고려시대 매병의 조형적 특징과 시기별 변화 - 김세진 문화재청

고려시대 11세기 후반 처음으로 제작되어 '존(尊)·준(樽)'이라는 용어와 병용된 매병은 측사면의 변화에 따라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될수 있었다. 측사면이 사선으로 뻗어올라가는 A형과 저부가 수직으로 올라가 둥근 어깨로 연결되는 B형, 과장된 'S'자 형태를 띠는 C형으로 나뉜다. 이러한 기형변화는 북송대부터 원대자기의 영향을 받아 조형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 고려시대 매병에서 보이는 측사면의 곡선적 변화는 금속제 매병의 단순한 기형에 대한 변화의 모색으로 판단된다.
 
고려시대 매병은 총 3시기로 변화의 과정을 살펴볼수 있었다. 제1기는 11세기 후반~12세기후반까지로 설정하였다. 이시기는 매병이 처음 생산되었으며 그 수량은 많지 않았다. 무문의 청자매병이 주류를 이뤘으며 화당초문 계열의 양각·철화청자 매병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제2기는 12세기말~13세기 후반에 해당하며 이전 시기에 비해 매병의 수량이 급증하였다. 양각·철화·철채·철백화·음각·상감기법 등 다양한 기법으로 절지문 계열, 운학문 등 여러 가지 문양이 장식되었으며 2가지 이상의 장식기법이 함께 한 기물에 표현되기도 할 만큼 매병제작에 있어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제3기 13세기말~15세기 전반으로 매병의 수량은 급격히 감소하고 상감기법으로 연화유문 계열이 장식된 매병이 중심을 이룬다. 매병의 이러한 시기적 변화 양상을 살펴볼 때, 당시 제작되었던 청자사이호의 형태 변화와도 닮아있어 수량이 적은 청자사이호 연구에도 중요한 기준자료로 활용될수 있을것으로 판단된다.
 
또 매병의 시기별 변화를 통해 철채청자매병이 13세기를 즈음한 시기에 등장하여 13세기 중반경 소멸하였으며 음각청자매병의 경우 기존의 연구결과물에서는 12세기 생산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으나 이번 분석을 통해 13세기 중반까지 그 제작이 지속되었음을 확인할수 있었다.
 
고려시대의 매병은 12세기에는 값비싼 고급 용기 또는 사치품으로 인식되었다가 13세기에 들어 그 생산이 증가하면서 일상생활용기뿐만 아니라 분묘에 매장된 장례용기로도 사용되었으며 14세기에 접어 들어 관사명이 새겨진 관용기로 활용되었음을 확인할수 있어 시기별로 매병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알수 있다.


고려시대 생산유적 출토 청자매병의 양상과 특징 - 김태은 단국대학교
 
출토품의 양상을 분석한 결과 그 성격에 따라 매병 생산요장을 5개 그룹으로 분류할수 있었다.
 
첫째로 고려 최고·최대의 매병 생산지로 강진 사당리 일부와 유천리 12호 가마가 있다. 특히 가장 일찍이 매병 생산을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진 사당리 생산품 중 일부 유형은 부안을 포함한 전국 요장에서 공유되어 제작되었다. 두 번째 그룹은 앞 그룹 요장을 제외한 나머지 강진과 부안 가마들이 질과 조형이 뛰어난 매병을 제작하나, 매병이 요장 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낮았다. 완·발·접시·잔에 생산을 보다 집중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세 번째 그룹은 강진과 부안 외 지역에서 중기에 운영된 가마들로 용인 보정리, 대전 구완동, 음성 생리 가마가 대표적이다. 작업은 조질의 완·발·접시·잔에 집중되고 특수기종으로는 주로 반구장경병이나 소호 정도로 단순한 가운데 매병이 드물게 극소량 제작되었다. 네 번째 그룹은 세 번째 그룹과 마찬가지로 중기에 운영되었으나 철화장식이 있는 장고·합·반·항·병·매병 제작에 특화를 보이는 가마들로 해남 진산리와 부산 녹산동 가마가 대표적이다. 다섯 번째 그룹은 고려 후기에 운영된 전국 여러 청자가마들로 서울 수유동 가마가 대표적이다. 강진조형에 영향을 받은 매병을 소량 제작햇다는 점은 세 번째 그룹과 유사하나, 병류의 주종이 중기의 반구장경병에서 매병으로 이동한점에서 차이가 있다.
 
최근의 중용한 고고학적 성과로 인해 매병 생산에 관해 과거보다 진전된 논의가 가능하였다. 그럼에도 풀이지 않은 여러 의문들이 있다. 매병 조형의 연원과 최초 생산 요장은 어디인가. 강진과 부안지역 매병의 조형적 차이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왜 생겼으며, 이를 통해 무엇을 알수 있는가 등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소비와 조형의 특징등  종합적으로 고찰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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