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백담사(百潭寺)는 도피처(逃避處)가 아니다
[기고] 백담사(百潭寺)는 도피처(逃避處)가 아니다
  • 강진신문
  • 승인 2016.12.25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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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만 ㅣ 전 의정동우회장

옛말에 산은 겹산이 명산이며 사람은 겹사람이 명인이라고 했다. 명산은 신령이 살아야 명산이라고 한다. 바로 그 산이 설악산이 아닐까! 외설악 백담사가 유명한 내면은 역사성이 깊기 때문이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 삼연(三淵) 김창흠(金昌鑫) 대학자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국가와 민족의 주체사상을 펼치기 위해서 머물렀던 곳이다.
 
인재는 갔어도 그의 사상은 살아 있으며 민족을 위한 사상은 죽어서 한 줌의 흙이 되었으나 위대한 그 얼은 영원히 남아서 민족의 진로를 밝히는 역사의 등불이 되었다. 1970년대 그 어느 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에서 가보고 싶은 곳, 외설악 깊은 곳에 자리한 백담사를 여행전문가의 자상한 역사성의 설명을 듣고 마음의 동요가 있었다! 외설악 주변 한개령과 오색양수 속초와 설악산, 강릉 경포대, 오죽현, 원통고개와 미시령 등 자상한 여행안내가 역마살의 나를 자극했다.

인간은 휴가와 여행이 필요하다. 휴식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 쌓인 갈등과 모든 감정을 상쇄할 긍정적인 감정을 찾아 떠나는 거다. 휴식은 집에서도 가능하다. 하지만 긍정적인 감정은 제한적이다. 떠남의 가치는 우선 새로운 것을 알게 돼 자신의 가치가 향상되는 것과 느낌과 의미 있는 대상과의 경험을 공유하여 관계를 심화하는 것 등에 있다. 더 높은 가치는 자신의 삶과 다른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볼 기회가 된다.
 
현실로 돌아와도 마음 챙긴 상태를 유지해 자신의 삶을 관찰하며 호기심을 갖고 늘 변화하는 삶을 산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여행을 재충전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삼으니 떠나는 건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에 즐겁다.
 
70년대 그때만 해도 교통이 불편한 시대였으며 버스를 이용하여 수차례 걸쳐 갈아타기를 반복하였다. 생소한 동해안 바닷길을 지날 때는 환상적인 즐거움보다 전쟁을 방불케한 동해안 바닷가 해안길이 충격적이었다. 해안길 전체가 철조망으로 얽혀 있었으며 요소요소에 살벌한 군인들의 감시 초소와 검문검색이 수없이 많았다. 해안길 도로 주변에는 전쟁 대비용 폭파 시설물이 설치되어 여차하면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은 공포의 불안감이 엄습했다.
 
백암온천에서 1박하고 그 뒷날 인재군 북면 용대리에 도착했다. 12월 중순 그날따라 나를 반겨주듯 첫눈이 내렸다. 기분 좋은 날이었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8km. 그때만 해도 백담사까지 가는 도로가 되어있지 않았으며 4km정도는 소형차가 다니는 길이며 4km정도는 도보로 오솔길 같은 길. 그러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일상의 잡다한 그 모든 것을 다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백담사에 도착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에 대웅보전과 요사채, 조금 외진 곳에 관음보전이 있었으며 감회가 새로웠다. 백담사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여행전문가의 설명대로 김창흡(金昌翕)이 은거하기를 맹세하고 영시암의 역사성과 매월당 김시습(金時習)과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은둔하였던 숨결의 발자취를 마음 깊이 음미해 보았다.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 그분들의 사상을 깊이 느껴보았다. 그분들의 깊은 사상에 새삼 숙연해졌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풍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감동으로 승화되므로 일상의 상념이 사라진 자리에는 먼 먼날의 추억과 기억의 심상이 그분들의 깊은 사상에 새삼 고개 숙여졌다. 인생 무상의 허무감이 사라졌다. 몸은 비록 가고 없지만 그의 영혼이 뿌리고 간 씨앗이 우리에게 꽃피워지고 있기를 바랐다.
 
백담사(百潭寺)는 설악산에 있는 사찰로 설악산 신흥사의 말사이며 647년(선덕여왕) 자장이 설악산 한계령에 창건하였다. 한계사로 처음 시작했으며 1432(세종14)년에 김시습이 부속암자 관음암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1455(세조 1)에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건하고 백담사라 개칭했으며 7차에 걸쳐 심화되었다. 백담사라는 이름은 골이 깊고 흐르는 물의 연원이 먼 내설악에 자리한 절이라는 뜻이다.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潭)를 세워보니 꼭 100개에 달하였고, 그리하여 '담'자를 넣어 백담사라 이름을 고치는 동시에 지금의 장소로 절을 옮겼다. 신기하게도 담자가 들어간 이후부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한용운이 『백담사 사적』을 편찬한 1928년 당시 백담사에 머물면서 『불교유신』과 『임의 침묵』을 집필하는 장소가 되었고 만해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절은 6·25전쟁으로 소실되었으며 1957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담사가 왜 역사성이 깊은가! 나라를 걱정하며 백성의 편에서 국익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던 분들이 이곳에서 백성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그 시대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기에 백담사의 역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 분들의 발자취를 찾아가 보도록 하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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