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 <21>
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 <21>
  • 강진신문
  • 승인 2016.06.25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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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 · 강진군녹향월촌인성학교 훈장>


死 鬪 사 투


죽을  사(死)               뼈  알(歹)
‘죽을 사(死)’의 갑골문은 ‘뼈 알(歹, 歺)’과 그 옆에 꿇어앉은 사람(人)을 그렸다. 오른쪽의 알(歹, 歺)은 살이 없는 앙상한 뼈 또는 부서진 뼈를 의미한다. 알(歹)은 부수의 역할도 하는데 이름이 ‘죽을사변’이다. 따라서 알(歹)이 포함된 한자는 죽음 아니면 불행과 관련이 깊다. 몇 글자를 보면, ‘재앙 앙(殃)’, ‘염할 염(殮)’, ‘빈소 빈(殯)’, ‘따라죽을 순(殉)’, ‘다 죽일 섬(殲)’, ‘잔인할 잔(殘)’, ‘위태로울 태(殆)’등이 그것이다.

이미 죽어서 해골로 변한 뼈를 바라보고 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자세로 보아 조상의 해골이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지 않고 그냥 들판에 두고 나무나 풀로 덮어놓았다고 한다. ‘장사지낼 장(葬)’자가 이러한 장례풍습을 대변한다. 그러다가 차츰 매장을 하고 흙으로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무덤 묘(墓)’자와 ‘무덤 분(墳)’자가 이를 증명(證明)한다.

 

싸움 투(鬪)

두 사람의 머리칼이 곤두섰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손은 상대의 턱밑을 노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휘어잡을 듯하다. 세차게 싸우고 있는 모습이다. ‘싸움 투(鬪)’자는 획수가 많고 일견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그림을 연상하면서 써보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한자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콩 두(豆)’는 鬪(투)를 ‘투’로 읽도록 하는 발음기호로 쓴 것 같고 ‘마디 촌(寸)’은 사람의 ‘손’을 가리킨다.

싸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락문화로서 한자리를 차지한다. 때론 민속놀이로, 인간 대 인간의 격투로, 투견이나 투계와 같은 동물들의 싸움으로 그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인간은 왜 이러한 싸움을 즐기는 것일까? 프로이드는 공격성을 인간의 본능가운데 하나로 보았다. 따라서 제거가 불가능하며 억누른다고 해소될 성질이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해소할 방법을 찾아야한다.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싸움이 다양하고 역사도 긴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採 集 채 집 
 

캐다/뜯다  채(採)          열매  과(果)
‘캐다 채(採)자는 그림에서 보듯 ‘손’과 ‘나무의 열매’로 만든 글자다. 그래서 처음의 글꼴은 ‘손톱 조(爫)’와 ‘나무 목(木)’의 조합인 채(采)로 썼다. 그림을 보면 무엇인가를 ‘캐다’보다는 ‘따다’의 의미가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국어사전에서 ‘따다’는 ‘붙어있는 것을 잡아떼다’로 풀이 되어 있다. 갑골문 그림과 딱 들어맞다.

채(采)는 시간이 흐르면서 뜻의 변이(變移)를 겪는다. ‘캐다’ 보다는 ‘풍채’나 ‘벼슬’등의 의미가 앞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로써 뒤로 밀려난 본래의 뜻 ‘캐다’를 살리는 한자를 새로 만들어야할 필요가 발생한다. 채(采)에 손 수(扌)를 첨가한 채(採)자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채(采)에 ‘풀 초()’를 더하면 채소(菜蔬)라 부를 때 쓰는 ‘나물 채(菜)’가 되고, ‘터럭 삼(彡)’을 더하면 색채(色彩)라고 부를 때 쓰는 ‘빛깔 채(彩)’가 된다. 채(采)자와 관련해서는 이정도의 한자만 알아도 충분하지 싶다. 

 

모일  집(集)           새  추(隹)
새들이 나뭇가지 위로 모여들고 있다. 고대의 문자 천재는 이 순간의 포착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 ‘모이다 집(集)’자의 실마리로 삼은 것이다. 포착은 한순간이었지만 그렇게 해서 발명된 문자는 수 천 년을 인류와 함께 살아 숨 쉬었다. 하나의 문자가 순간의 깨달음처럼 그의 머릿속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길고 긴 고민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때로 발명이 우리에게 감동의 스토리를 안겨주는 것은 바로 이런 이면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대의 글꼴 집(集)은 ‘추(隹)’와 ‘나무 목(木)’의 합체자이다. 추(隹)는 오른쪽 그림에서 보듯 ‘새’를 보고 만든 글자다. 예를 들면 ‘하나 척(隻)’은 새 한 마리가, ‘두 쌍(雙)’은 새 두 마리가 손 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한자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에서 실학을 집대성(集大成)하셨다. 집대성은 과거의 것을 모아서 밝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새로운 체계를 완성함을 뜻한다.  

 

 降 臨 강 림
 

내릴 강(降)               걸음 보(步) 

‘내릴 강(降)’자의 글꼴은 ‘언덕 부(阝)’와 ‘내릴 강(夅)’이다. 갑골문에서 보듯 부(阝)는 계단이다. 강(夅)은 계단을 딛고 내려가는 두 발바닥이다. 오른쪽 ‘걸음 보(步)’를 반대로 쓴 모양으로 보면 되겠다. 강(降)자는 고대 중국의 황하 유역에서 발견된 수혈식 거주양식과 관련이 깊다한다. 수혈식(竪穴式)이란 글자 그대로 구멍을 지면 아래로 수직으로 파내려간 형식이다.

그 지하를 오르내리려면 언덕계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발바닥을 상징하는 그림에서 좌우로 튀어나와 구부러진 선은 엄지발가락이다. 강(降)은 엄지발가락이 아래로 향해있으니 내려가는 것이 확실하다. 이 강(降)자는 ‘항복(降伏)하다’의 항(降)으로도 쓰는데 항복은 모든 것을 내려놓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 뜻이 일맥상통함을 본다. 현대사회는 이 강(降)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승강기(昇降機)가 아니고서야 날마다 어떻게 높은 건물을 오르내릴 수 있겠는가.

 

임할  임/림(臨)          신하  신(臣)
‘임할 임(臨)’의 고대글자는 사람(人)과 큰 눈(臣) 그리고 세 개의 그릇(口)을 구성요소로 한다. 그림에서 보듯 ‘신하 신(臣)’자는 눈을 상형한 글자다. 몇 년 전 다산시민강좌(강진다산실학연구원 주관)에서 다산의 중용자잠(中庸自箴)을 학습하는 기회가 있었다. “군자가 암실 가운데 있으면서도 몹시 무섭고 두려워하여 감히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상제가 그에게 임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君子處暗室之中, 戰戰栗栗, 不敢爲惡, 知其有上帝臨女也).” 그 때 임(臨)자를 관심 있게 보았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3,000년이 훌쩍 넘는 긴 시간동안 위치와 모양이 약간 변했을 뿐 본 모습은 거의 그대로이다. 눈에서 나오는 세 개의 선은 눈길이 그릇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임했다’는 의미를 선명하게 하기 위한 표시로 보인다. 그러면 임시방편(臨時方便)의 ‘임시’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음식을 먹지 않고 임시(臨時)로 보고 있다는 데서 파생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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