專 業  전업

   
오로지 전(專)

'오로지 전(專)'자는 '전문가(專門家)', '전업주부(專業主婦)', '전횡(專橫)을 일삼다.' 라는 말속에 등장한다. '오로지'라는 대표적인 뜻 외에 '마음대로 하다' '독차지 하다''하나로 되다' 등 그 뜻이 다양하다. 전(專)은 그림에서 보듯 두 가지 소재를 가지고  만들었다. 하나는 물레이고 또 하나는 손이다. 물레를 돌리고 있는 모습을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최근의 자료에 의하면 물레의 역사는 적어도 3,500~4,000여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물론 원시 비단도 발굴되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유물에서도 함께 출토되었으니 그 역사가 짧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물레의 긴 역사는 증명된 셈이다. '게으른 여자들은 겨울이 오면 후회하고, 부지런한 부인들은 물레를 주야 벗으로 삼으니, 우마도 사고 전답도 사서 천금만금을 모을 수 있다.'는 노래가사가 전하듯 물레는 한 여성의 삶을 판단하는 기준이면서 한 가정의 부(富)를 일구는 가업이었음을 알게 된다.  


   
 일  업(業)

'일 업(業)'자에 대해 학자들은 고대건축의 이모저모를 함축하고 있는 글자로 본다. 건축의 주재료는 목재이며, 또 못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홈을 파서 짜 맞추어 가는 공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업(業)의 쓰임은 상상 이상으로 그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직업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지만 성경에서는 소유(몫)나 상속받은 유산을 뜻한다고 한다. 또 업은 산스크리트어 '까르마(karma)'의 번역어로서 행위를 의미한다고 한다. 행위는 몸(身), 입(口), 생각(意)으로 구분되는데 이 삼업(三業)은 현생이 아니면 다음 생에서라도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고 하니 이것이 소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개념이다. 그리고 업은 민간신앙에도 등장한다. 집안의 재복과 행운을 관장하는 가신(家神)중 하나다. 그런데 이 업(業)은 다른 가신과는 다르게 동물의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믿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동물이 바로 구렁이이다.

 

 

奇 異 기이

   
 기이할  기(奇)

'기이할 기(奇)'의 현재 글꼴은 '큰 대(大)'와 '옳을 가(可)'의 결합이지만 그 기원은 재미있는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먼저 대(大)자는 정면에서 바라본 사람이다. 클 태(太)와 하늘 천(天)과 지아비 부(夫)는 모두 이 대(大)자의 확장된 버전이다. 그림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어떤 이미지의 묘사일까? 위는 무엇인가를 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래그림이 묘하다. 모양이 다른 단 두 개의 선만 보일뿐이다. 대담한 생략기법이 동원되었다. 짐작하겠지만 아래그림은 바로 '말(馬)'이다. 말의 전체적인 각도는 역동성을 불러일으킨다. 예사롭지 않는 그림실력이다. 뇌리를 스치는 하나의 의문은 어떻게 이 그림이 '기이하다'는 의미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타다' 또는 '달리다'로 하면 모를까. 말을 타는 모습이 기이해서였을까. 흥미를 끄는 주장이 하나 더 있다. 소식을 전하러 가는 모습이란다. 특별한 소식에서 기이하다는 의미가 파생되었다는 것이다. 


   
 다를  이(異)

'다를 이(異)'자의 현재 글꼴은 '밭 전(田)'과 '함께 공(共)'이다. 그러나 고대 글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田)의 머리모양과 두 손을 가진 사람의 형상이다. 머리 모양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 이를 두고 갑골학자들은 가면을 쓴 다른 종족의 모습으로 해석한다. 손 모양은 가면극을 연상하게 한다. 가면극은 배경과 음악과 춤이 섞여있는 연극으로 그 기원도 고대로까지 올라가지만 동서양 구분이 없다. 왜 인간은 긴 세월 동안 가면과 함께 했을까. 심리학자인 '칼 융'의 시각은 이렇다. '인간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또 다른 얼굴을 만든다.' 융은 그것을 페르소나(persona), 즉 가면(假面)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애초부터 가면 쓴 사회적 동물인 셈이다. 이런 현상은 온라인 공간에서 더욱 심하다. 이를 'SNS 허언(虛言)증'이라고 부른다. 자기의 직업·경험·재력·신분 등을 거짓으로 꾸며내 마치 진실인 것처럼 포장해 말하는 증상이다.

 

 

交 替 교체

   
 서로/사귈  교(交)

'사귈 교(交)'는 다리를 꼬고 있는 사람을 그렸다. 고대사회에서는 가뭄이 들면 무당을 비가 올 때까지 땡볕에 세워두거나 심지어 불태워 죽이는 잔인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무당은 살아남기 위해 비를 부르는 춤을 추어야 했다. 만약 하늘이 비를 내려주면 살겠지만 그 반대이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 해석대로라면 交(교)라는 글자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선 무당의 처연(悽然)한 춤사위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있다.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동작으로 본다. 지금이야 의사소통하는 방법이 너무 많지만 먼 옛날에는 서신을 주고받든지 아니면 직접 찾아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바삐 다리를 움직여 걸어가는 그림 안에 '서로' '사귀다' '주고받다'등의 뜻을 담았던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형벌 중 하나로 두발을 교차해 꺽어버린 모습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바꿀  체(替)  / 설  립(立)

'바꿀 체(替)'자는 '지아비 부(夫)'와 '해 일(日)'로 구성되어있지만 사실 그 기원은 서 있는 사람을 뜻하는 '설 립(立)'자 두 개로 시작한다. 두 사람을 그려서 '바꾸다'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단순히 어떤 물건의 교체가 아닌 사람의 교체가 주제임을 짐작케 한다. 지금이야 계좌이체, 자동이체, 정권교체, 세대교체니 하면서 무엇인가를 바꾸는 모든 말에 사용하지만. 그림을 보면, 두 사람을 나란히 두지 않고 앞과 뒤의 구도로 배치했다. 이런 구도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의 문자 천재는 사람의 교체라는 의미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수법으로 회화기법 중 하나인 원근법(遠近法)을 들고 나왔다. 앞사람은 교체되어 새롭게 등장한 사람이고 뒷사람은 물러난 사람이다. 나중에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해 일(日)'이 더해졌다. 인위적이 아닌 자연스러운 세대교체가 이 글자의 본뜻임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