修 身 (수신)

   
 닦을 수(修)

'닦을 수(修)'자는 '바 유(攸)'와 '터럭 삼()'으로 이루어진 글자다. 수(修)는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바로 잡아 고친다는 뜻인 수정(修正), 손보아 고친다는 뜻인 수리(修理)·수선(修繕)·보수(補修), 마음과 몸을 닦는다는 뜻인 수련(修練)·수양(修養)·수도(修道)·수행(修行), 배우고 마쳤다는 의미인 수료(修了)·이수(履修), 무엇인가를 꾸민다는 뜻인 수식(修飾), 대학을 가기 위한 시험인 수능(修能) 등이 그것이다. 이제 수(修)의 원형인 갑골그림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사람의 등 뒤에 회초리를 든 손이 그려져 있다. 졸음을 참지 못한 수행자를 향해 죽비를 내리치는 장면 같다. 한자에서 '복()'이라는 글꼴이 보이면 '회초리를 든 손'으로 '치다'로 해석하면 된다. '빛날 빈(彬)' '선비 언(彦)' '드러날 창(彰) 등에 쓰이는 터럭 삼()은 나중에 추가되었다. 조그만 생각해 보면 삼()을 끼워 넣은 이유를 금방 알지 싶다.

   
 몸  신(身)

'몸 신(身)'자는 위의 그림에서 시작해서 현재의 글꼴로 정착되었다. 이 고대글자는 무엇을 그린 그림일까. 어떤 학자는 사람의 불룩 튀어나온 배라고 하면서 이 글자의 본래 뜻은 '배'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갑골문에서 질신(疾身)은 '배 아픔'을 뜻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또 다른 주장은 임신한 여인의 옆모습으로 보는 견해다. 배안의 점은 태아를 상징한다. 글자를 만들면서 그 속에 지혜와 철학뿐 아니라 내면의 정서까지 담으려했던 고대지식인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면서 이 글꼴을 그려냈을까. 우리의 몸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하나하나 만들어져서 완전체로 이 세상에 나온다. 우리 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볼 수 있는 몸에서 볼 수 없는 몸까지 어머니의 사랑이 스며들지 않는 곳이 없다. '몸 신(身)'자는 바로 어머니의 사랑을 속뜻으로 품은 글자다. 내 몸이든 타인의 몸이든 소중히 여겨야할 이유다.

 

聖 君 (성군)

   
 성스러울 성(聖)

'성스러울 성(聖)'자의 자소는 귀와 입과 사람이다. 아니 사람 그 자체다. 그림에서 보듯 입보다 귀가 유난히 크다. 최초의 문자 창작자는 '성스러움'과 무슨 연관성이 있어 이런 구도를 선택했을까. 먼저 문자창작과정 속으로 들어가 보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외부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문자의 발명을 자극했다. 문자를 만들면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어떤 형식을 통해 담아낼까. 또 문자가 세상에 나왔을 때 동시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아! 그 뜻을 말하려고 하는구나." 그 공감을 과연 불러 일으킬 수 있을까. 아마도 이 두 가지 문제가 큰 고민거리였을 것이다. 만약 위의 갑골문의 글꼴을 보고 대다수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성스러움'을 의미하는 문자로 받아들였다면, 당시의 사회적 정서가 말하기보다는 들음을 더 소중히 여겼음을 증명해준다. 역설적이게도 듣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을 성군(聖君)으로 추앙하는 이유를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임금 군(君)     벼슬/다스릴 윤(尹)

'임금 군(君)'자는 '다스릴 윤(尹)'과 '입 구(口)'의 합체자다. 갑골문이 만들어진 지도 3,000년이 훌쩍 넘었지만 자소(字素)는 물론이고 글꼴 역시 그대로다. 말로 세상을 다스리는 지상 최고의 권력자는 왕이자 임금이다. 그래서 왕권시대 임금의 명령인 어명(御命)은 추상(秋霜)보다 더 위엄이 있었다. 군(君)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바로 윤(尹)자다. 그림에서 보듯 윤(尹)은 손으로 지팡이 같은 것을 쥐고 있다. 학자들은 이 지팡이에 의미를 부여한다. 권위나 권력을 상징하는 지팡이라는 것이다. 혹자는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인 점을 감안한다면 신탁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말한다. 아무튼 윤(尹)이 '벼슬' '다스리다' '바로잡다' 등의 뜻을 품게 된 이유는 분명해졌다. 만인지상(萬人之上)에 오른 자를 일인지하(一人之下)에 두고 세상을 다스렸던 자가 바로 군(君)이었던 것이다.

 

我 執 (아집)

   
 나/우리 아(我)

'나 아(我)'자는 날이 셋 달린 삼지창을 그려 만든 글자다. 삼지창은 짐이 곧 국가였던 시대 왕의 권세를 상징하는 무기라고 한다. 아(我)는 '절대 권력을 가진 나'인 것이다. 고대인은 아(我)에 '나'외에도 '외고집' '고집을 부리다'라는 뜻도 담았다. 하나같이 절대 권력의 부정적인 속성들이다. 고대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심리학의 대부인 프로이드는 사람의 마음을 셋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 번째가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적인 원초아(原初我)다. 두 번째는 원초아를 제어하면서 현실을 고려해 행동하려는 자아(自我)다. 세 번째는 도덕성을 추구하는 초자아(超自我)다. 프로이드는 사람은 6∼12세 사이에 도덕관념인 초자아가 발달하게 되는데, 부모의 말과 행동이 초자아 발달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가 주장한 핵심은 이렇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경험이 한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잡을 집(執)          다행 행(幸)

'잡을 집(執)'의 현재 글꼴은 '다행 행(幸)'과 '둥글 환(丸)'의 조합이다. 그러나 갑골문에서 보듯 환(丸)의 자리가 사람이었음이 밝혀졌다.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 꿇어앉은 모습이다. 무엇을 의미하는 그림일까. 답의 키는 왼쪽의 행(幸)자에 있다. 그림에서 보듯 행(幸)은 본래 형틀이었다. 죄인이나 포로의 손목을 끼우고 옥죄어서 행동을 통제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형틀인 행(幸)에 '다행' 또는 '행운'의 의미가 붙은 것일까.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한자에는 이런 사례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혼란(混亂)에 쓰는 '어지러울 란(亂)'자는 '다스리다'는 뜻도 함께 품는다. 혹시 죽음은 면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는 안도의 마음이 반영된 것일까. 아무튼 행(幸)의 극적인 변신은 흥미롭다. 나의 생각을 형틀에 잡아 묶고 남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아집(我執)이다.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행운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