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어떤 집에서 살 것인가, 주택예찬
[기고] 어떤 집에서 살 것인가, 주택예찬
  • 강진신문
  • 승인 2015.12.2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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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민 · 강진군청 세무회계과>

'어떤 집에서 살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해서는'집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먼저 해볼 필요가 있다. 저명한 건축가인 르꼬르뷔제는'집은 인간이 살기 위한 기계'라는 다소 생소한 말을 남겼다. 집은 인간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쾌적하고 편리한 환경을 빈틈없이 제공하는 기계와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최초의 집은 동굴이었을 것이고 비와 바람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기능에 충실한 집이었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부의 상징적인 척도가 되었고 자신들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 수단으로 바뀐 듯하다. 초등학생들마저도 아파트 평수로 친구를 평가하고 나눈다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처럼 나오고 드라마 속에서 풍자되는 것을 보면, 그 정도가 지나친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한 아파트 건설사의 광고에 등장하는 문구가'요즘 아이들에게 아파트가 고향입니다'이다. 지금의 아이들이 커서 찾아와야 할 고향집이 아파트인 것은 사실이지만 시골집의 정겨움이 없어진 듯해 씁쓸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다는 서울에 주택이 아닌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은 필연적일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문화시설과 편의시설들에 근접해 살고자하는 욕심 또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과밀화된 도시의 아파트에 살며 감내해야할 불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요즘 직장에 다니며 귀촌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건데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시골에서 자라온 나에게 아파트란 것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을 때 기쁨보다는 실망감이 훨씬 컸다. 마치 집이란'기계'에 인간이라는'부속품'으로 끼워 맞춰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르꼬르뷔제가 말하려 했던'기계'가 이런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고 아이들은 집에서 뛰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단지 서로 배려가 없었다는 것이'층간소음 칼부림'같은 사건을 대변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파트라는 시스템에서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나의 어린시절의 기억들은 모두 주택인 집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마당에서 키우던 병아리와 토끼부터 철마다 열리던 감, 매실, 살구 따위를 따먹던 기억, 그리고 겨울이면 처마에 맺혀 있던 대형 고드름까지.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누릴 수 있는 것과 아파트 생활의 편의를 바꾸라면 고민할 가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요즘은 집이 하나의 화폐가 되었다. 잘 팔리고 비싸게 팔리는 '아파트'가 좋은 집이란 타이틀을 쉽게 얻는다. 이 순간에도 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아파트를 벗어나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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