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역사현장을 찾아서] 다산학당, 강진 문화를 알리다
[강진의 역사현장을 찾아서] 다산학당, 강진 문화를 알리다
  • 강진신문
  • 승인 2015.10.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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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식(향토문화재 연구소장)

지난 1986년 개설...재능기부로 각 읍면 향토사, 다산 강의

다산학당은 1986년에 개설하여 40여 년째 강진군 향토사와 다산 강의를 하고 있다. 강진군은 11개 읍·면이며 건강이 여의치 않아 실내에서 관감을 전달하되 4서 강의도 함께 해 오고 있다. 벌써 듣는 이들의 요청으로 읍·면 1회씩 현장에서 강의를 하기로 결정하여 끝나는 지점에 왔다.

시작은 7월 20일 대구 수동 여택정 상량문, 8월 6일 옴천 구곡의 동구곡, 8월 13일 칠량 장포의 장천재와 김상준, 8월 20일 작천 용정의 작천 부자, 8월 27일 도암 성자의 신암 김인영과 조선애국가, 9월 3일 군동 석교의 밀양박씨 3세 6효와 정다산, 9월 10일 병영 박동의 일망대와 병영 출동의 축성사적비, 9월 17일 무위갑사 벽화와 강 질, 9월 24일 성전수암의 송계와 강진군청, 10월 1일은 신전 백룡의 백운처사 이일만, 10월 8일은 마량 3마산의 청마봉, 10월 15일은 강진읍 서문의 강진읍 1차 독립만세 작업터 김위균가의 순서로 진행해 오고 있다. 강진읍은 바뀔 수도 있다.
 
강의를 읍·면 별로 하는 이유는 우선 행정 치소별로 하되 그 지역에서 꼭 알고 전송해야 할 곳이기 때문에 선별한 것이다.
 
수동 여택정 상량문은 1840년 5월 1일에 작성되었으며 기능은 마을의 자제와 면내의 자제들을 가르치던 서재(면학교)이다. 이곳에서는 1894년의 동학, 1919년의 독립운동과 농민운동, 그리고 1950년 6월 25일의 주된 이가 모임을 갖고 실행한 곳이다.
 
옴천 동구곡은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에 적힌 강진과 영암 경계 마을 중에 하나이다. 그 내용에는 월남동, 무위동, 좌곡 등의 마을이 적혔는데 강진마을이 국가 기록에 적힌 것이 최초이다. 장포의 장천재는 김해 김씨 문경공파 후손인 20세 김상준(1869. 7.2~1929.1.22)이 읍내에서 살다가 도암용산과 칠량 반계를 거쳐 장포에 살면서 후학 양성을 위해 건립됐던 서당이다. 그 건물은 현재 옮겨서 차씨 개인 집으로 사용하고 있고 그 때 구입한 4서3경이 보존되어있다.
 
용정의 작천 부자는 초곡, 이지, 열수 3개 면 중에 열수 면에 속한 용정을 말한다. 김창진(1886.12.5 ~1962.1.16)이 읍내의 김충식 보다 현금이 더 많았다고 한다. 성자의 신암 김인영(1892.5.8~1972.1.3)과 조선 애국가는 강점기 때 작성된 가사이다. 원작자의 표기가 없어 아쉬우며 신암은 당시에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고 전해온다.
 
석교의 밀양박씨 3세 6효와 정다산은 박노성(1832.2.17~1890.2.7), 종대(1880.3.22 ~ 1959.6.8), 종삼(1887.1.6~1918.2.9), 종훈(1892.5.25~1922.4.12), 상수(1905.11.27~), 명수(1919.5.17~1980.4.29)와 1828년 11월2일에 다산이 황상(1788.1.20~1870.12.22)에게 보낸 편지다. 그리고 석교출신 천기대사와 옥련사 창건주 박능화(1907.4.23~1996.)에 대한 소개가 더 있다.
 
박동 일망대와 출동사적비는 마천목(1358.7.25~1431.1.25)이 남긴 설성터 잡은 기록, 병영성 주변의 지로, 동성, 남성, 성남, 박동, 동3인, 서3인, 남3인 등 8개 마을에 남겨진 중요처 기록이다. 무위갑사 벽화와 강 질은 극락보전 벽화의 아미타 그 상단에 관음과 지장 그리고 좌우에 나한상 3구와 화불 2구 등이다. 다른 자료는 보살, 가섭, 아난존자 등 7존 도라 하며 벽화 기록의 시주자, 강 질에 대한 내용 그리고 목조3존불 등의 내용이다. 그런데 관음은 점안이 안 되었다.
 
수암송계와 강진군청은 진경대사(854~923)와 1429년부터 1475년까지의 46년 간 강진군 치소를 둔 사실 그리고 의병의 주역 이언빈(1453.10.18~1597.7.5)의 내용이다.
 
백룡의 백운처사 이보만(1625~1695)은 1637년부터 보길도에 살던 장인 윤선도(1587.6.21 ~ 1671.6.11)의 수발을 든 내용, 그리고 다산과 우암의 극찬 또 다산초당 제자 이기록(1780~1837), 이유회(1784~1830), 이강회(1789~1836)과 백언보(강진속담69수)에 대한 기록이다. 서문 1차 독립만세 작업터 김위균가와 경수당 고공실기는 선택해서 강의할 것이다. 마량 청마봉은 고마도, 청마봉이라 해야할 이유, 지도별, 5마지간, 역사별로 마무리 되었다.
 
Knowledge is money.  즉 지식은 돈이다. 1개 읍·면 강의 준비 때마다 자료수집, 번역, 탈고, 수정 등을 거치는데 그 기간은 짧아도 1주일은 걸린다. 1일 30만원씩만 계산해도 210만원이 소비되니 합하면 2천100만원어치를 재능 기부한 셈이다. 읍·면을 순회하면서 특강을 한 것은 현지를 보고 느낌을 인식시켜서 오래도록 전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참여는 수암을 대표로 하고 백은이 부책임, 감목이 총무를 맡았다. 그 밖에 소천은 강의 때마다 음료수를 마련했다. 또한 지공, 월탄, 해운 진안, 석당, 청강, 초관, 유금, 태천 등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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