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9>
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9>
  • 강진신문
  • 승인 2015.07.10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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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 · 강진군녹향월촌인성학교 훈장>

憂 鬱 (우울)

근심 우(憂)
'근심 우(憂)'는 '머리 혈(頁)'과 '마음 심(心)' 그리고 '천천히 걸을 쇠(夊)'의 합체자이다. 근심 많은 머리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주장과 머리와 가슴을 감싸 안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는 주장이 맞선다. 어느 주장이든 '근심'이나 '고민'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군자의 도(道) 세 가지 가운데 하나 '仁者不憂(인자불우)'가 있다. '인(仁)한 자는 근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공자 스스로도 능히 이것을 할 수 없다고 했다(我無能焉) <논어 헌문편>. 그 대상과 내용이 다를 뿐 한평생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어차피 그림자처럼 떼어낼 수 없다면 근심(憂)의 지향점(指向點)을 '優(우)'로 두면 어떨까싶다. 人(사람)과 憂(근심)의 합체자인 優(우)는 '넉넉하다' '도탑다' '품위 있다' '뛰어나다'를 뜻으로 거느리고 있는데 새기면 새길수록 좋다.

답답할 울(鬱)
갑질이 만연된 사회는 분노와 우울함을 부른다. '울(鬱)'의 갑골문은 '수풀(林)속에 두 사람이 있음'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자세가 사뭇 다르다. 위에 있는 사람은 大(대)자 형으로 당당한데 반해 아랫사람은 땅바닥에 엎드려 있다. 무슨 장면일까? 윗사람은 갑질하는 중이요, 아랫사람은 밟히고 차이는 중이다. 무슨 연유로 숲속까지 끌려와 당하고 있는 것인지. '울(鬱)'자의 탄생스토리는 우리를 더욱 울적하게 만든다.

갑골문에서 보듯 초기 간결했던 자형(字形)이 무슨 일로 지금의 '울(鬱)'처럼 답답하게 변했을까? 그것은 다양한 뜻의 추가(追加)와 관련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향기롭다'는 술을 의미하는 '울창주 창(鬯)'을, '아름답다'는 곱게 자란 머리털을 상징하는 '터럭 삼(彡)'을 글자의 구성요소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우울(憂鬱)은 부정적인 결말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는 측면에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다.

 

星 雲 (성운)

별 성(星)
별 성(星)'의 갑골문은 '口'모양과 '生(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문은 오늘날의 字形(자형)과 비슷하다. 여러 개의 '口'모양은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상징한다. 그러면 '生(생)'의 쓰임은 무엇일까. 과학이 발달하면서 우주공간에 떠있는 별도 여느 생명들처럼 생(生)과 사(死)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星(성)'은 곧 '살아있는 별'이다.

'빛날 晶(정)'도 해가 아니라 별들을 보고 만든 글자인 듯싶다. 깜깜한 밤하늘,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의 움직임에서 '빛남'이라는 개념을 포착한다. 인간의 지적호기심은 이 개념을 표현해내는 구체적인 기호체계에 주목한다. 그것은 순전히 경험을 재구성한 창작물이다. 고대인들의 쉼 없는 지적활동의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 비슷한 글자 '번성할 昌(창)'도 수많은 별들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물론 昌(창)은 '떠오르는 해'와 '수면에 비친 해의 그림자', 즉 일출(日出)을 묘사한 글자라는 해석도 있다.

구름 운(雲)
'구름 운(雲)'은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형상화했다. 갑골문에서 보듯 처음에는 '云(운)'으로 썼다. 그러다가 云(운)자가 '말하다'의 뜻으로 쓰이게 되자 '雲(운)'자를 새로 만들었다. 구름은 공기 중에 떠돌다가 물방울이 형성되면 마침내 비가 되어 땅으로 떨어진다. '云(운)'과 '비 우(雨)'를 조합해 '구름 운(雲)'자를 만들어낸 옛사람들도 이런 자연의 법칙을 이미 알았던 것일까. 그 아이디어가 정말 과학적이다.   

'星雲(성운)'이란 별과 별 사이에 존재하는 가스 덩어리와 티끌의 집합체를 일컫는 말이다. 우주공간에는 평균적으로 63빌딩만한 공간에 담배연기 알갱이만한 티끌이 1개정도 들어있다고 한다. 얼핏 보기에 매우 희박해 보이지만 우주의 크기가 워낙 넓기 때문에 이러한 별과 별사이에 존재하는 티끌의 영향으로 별빛이 어둡게 또는 붉게 관측된다고 한다.

 

羞 恥 (수치)
 

부끄러울 수(羞)
珍羞盛饌(진수성찬)에 쓰는 '羞(수)'는 양(羊)과 축(丑)을 결합한 글자다. 그런데 갑골문은 丑(축)이 본래 '손'이었음을 말해준다. '丑(축)'을 '양을 잡는 손'으로 해석하면, 羞(수)자에 '음식'이란 뜻이 있음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부끄럽다'는 뜻이 있음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山海珍味(산해진미)로 한상 가득 차려놓고도 오히려 차린 것 없다고 부끄러이 말하는 우리네 심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면 모를까.

맹자는 羞惡之心(수오지심: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義(의)의 端(단)이라고 했다. 성리학을 열었던 주자(朱子)는 義(의)를 본래부터 '마음에 있는 德(덕)'으로 규정했지만, 다산은 '행사 뒤에 붙이는 명칭'으로 보았다. 다산은 仁義禮智(인의예지)가 다 그렇다고 주장했다(仁義禮智之名, 成於行事之後). 다산이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실천'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실천은 다산 경학의 뼈대다. 

부끄러울 치(恥)
'부끄러울 恥(치)'는 '귀 이(耳)'와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다. 심하게 부끄러운 마음(心)이 들면 귀(耳)까지 후끈거린다. '부끄러울 恥'자는 호되게 부끄러움을 경험했던 사람의 창작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羞恥(수치)는 '부끄러움'이고, 수치심(羞恥心)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이다. 마음속으로부터 부끄러움을 느끼는 순간은 '나는 사람이다'임이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람이 동물하고 다른 점은 부끄러워 할 줄 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부끄러움의 감정은 도덕성을 지향하게 하는 단초가 된다. 그러니 부끄러워하는 마음 그 자체는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정작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일을 해 놓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일관된 자기변명과 뻔뻔함이다. 맹자도 말했다. 부끄러움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無羞惡之心, 非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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