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다산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 강진신문
  • 승인 2015.01.30 17: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성환 <좋은후보시민추진위원회 간사>

지구별이 태양을 한 바퀴 돌고 왔다. 그의 부지런함은 오늘도 스스로 돌며 나아간다. 무심하게 움직이는 이 지구별의 위용에 그만 자지러지고 만다. 삶은 그의 운동만큼 자리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데 해님은 눈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어느새, 달님은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모양새가 결코 달갑지 않다.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이 감정들의 얽힘은 '새해증후군'일 성 싶다.

저 현수막들의 펄럭거림이 어지럽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다. 이름난 학교에 합격을 하였고, 쉽지 않은 시험을 통과하였다고 야단이다. 뉘댁인지도 모르면서도, 그것이 우리들 각각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면서도 못내 박수를 보내고 만다. 이 울렁거림은 분명 병이다. '꼴찌콤플렉스'라고나 할까? 그런데 빛나는 그의 수고와 보상이 사회적인 것처럼, 이 개인적인 우울증 또한 사회적이다. 빛나는 최고와 우울한 꼴찌는 무중력의 저 우주에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땀과 피가 버무려져 생성된 중력이 작용하는 이곳에서의 문제라는 것이다.

지구별에서 동거하는 꼴찌에게도 그의 공전과 자전은 의미가 있을까? 언제 한번 꼴찌가 생의 주체로 살았던 적이 있었을까? 꼴찌는 지구별에 더부살이하는 존재가 아닐까? 더욱이 오늘날 지구별을 작동시키는 운영체제에서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상품화'의 진입장벽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이것은 자본주의라고 명명하는 현 운영체제의 핵심원리인 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장'이라는 검색대를 통과해야만 한다. 존재한다는 그것만으로 존재가치를 말하려고 하는 것은 어림없는 수작이다. 물건이 물건이 되려면, 급기야 사람이 사람이 되려면 시장이 말하는 교환가치로 환산되어야한다. 더구나 문제의 심각성은 그 시장의 퇴행이다.

시장의 검색대가 개인의 개별적인 능력만으로는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것은 옛말이 되었다. 양극화 논쟁이라든지, 1대9의 통계라든지 하는 시세 말도 이를 반증한다. 각자도생이라는 세련된 수사는 그러므로 시장의 비겁한 변명이 되고 만다.

오래전 그의 언명을 인용하여, 세상살이 풍경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그린다면 꼴찌의 엄살일까? 물론 이런 시선의 해석틀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기도 하겠다.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를 진단하던 면역학적 설명틀이라고 말이다. "현재보다는 과거의 대상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철학자 한병철은 친절하게 지적을 덧붙여주기도 하겠다.

그러나 꼴찌의 이 엄살은 여전히 우리사회의 유효한 해석의 틀일 성싶다. 이 시대의 풍속어로 단정할만한 '갑질'이라는 말이 단적인 실례이다. 갑과 을의 계약관계가 그들 간의 권력관계도 너머 상대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행위의 원천으로 횡행하고 있었다. 갑과 을이라는 각각의 사회적 지위가 만든 거리는 현대판 신분제와 다름 아니었다.

이즘에서 '최고콤플렉스'를 사회의 병적인 증상으로 진단한 소설가 최윤의 질타를 되새겨본다. 최고가 한 사회의 이념이 되었을 때, 단시일 내에 쉽사리 만들어지는 크고 작은 최고들의 자리나 가치가 상대적이고 순환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또한 사회의 통념은 그것을 권위적으로 용인할 뿐만 아니라 부추기기도 한다. 이러므로 어려서부터 투기적으로라도 무조건 최고를 지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꼴찌도 있고 최고도 있음을 본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꼴찌의 이 목마름은 무엇 때문일까? 작가 박완서가 그의 산문집에서 가슴 뭉클해 하던 꼴찌는 오늘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까? 우리는 꼴찌에게 뜨거운 갈채를 보낼 수 있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