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에서]감나무와 까치
[다산로에서]감나무와 까치
  • 특집부 기자
  • 승인 2003.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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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우.온누리문학회회장

옛날에는 시골 왠만한 동네에 가보면 집안에 감나무 몇 그루씩 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감이 아닌 떫은 감이지만 가을철이면 물렁물렁한 홍시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농촌인심의 훈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종가댁에서 제사지낼 때 제일 중요한 것이 곶감인데 곶감은 떫은 감으로 만든 것으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귀하게 생각하고 아껴 먹었던 과실로 가장 소중하게 여겨왔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을이면 까치밥이라 하여 나무끄트머리에 한 두 개씩 남겨놓아 말 못하는 미물에게까지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여유로움도 가지고 있었다.

먹을 것이 없던 겨울철에 나무 끄트머리에 앉아서 까악까악 하고 울어대는 까치는 먼 옛날부터 우리조상들과 함께 살아왔던 길조다.
섣달 그믐날을 작은설 혹은 까치설이라고 한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하는 노래에서 알다시피 까치설날은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설 하루 전날이면 객지에 살고 있는 자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반가웠으면 작은설을 까치설이라 하였겠는가. 까치와 떫은 감 이 두 가지는 어쩌면 인간이 만들어낸 악어와 악어새인 줄도 모른다.

까치는 반가운 손님을 제일 먼저 전해 준다하여 우리에게 너무나 친근한 새이지만 같은 종에 속하는 까마귀 역시 반포지교라는 의미의 효조로써 널리 알려진 새이기도 하다.
중국 진나라 시대 이밀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4살 때 개가하여 어려서 할머니 밑에 고아아닌 고아로 자랐다. 게다가 몸도 약하여 9살이 되도록 걷지도 못하였다. 마침내 할머니의 지극정성으로 자란 이밀이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진나라 무제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 친히 관직을 내려 등용코자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말았다. 무제는 격노하여 불사이군의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여 처벌하려고 하였다.

이때 이밀은 추상같은 조서에 응할 수 없는 솔직한 심정을 밝혔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진정표(陳情表)다. 유비의 출사표가 충성의 상징이라면 이밀의 진정표는 효심의 상징으로 불린다. 그는 진정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까마귀 같은 새도 부모가 늙으면 새끼가 먹여 살리는데  하물며 사람이 그렇지 못한데서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무제가 이 진정표를 읽고 그 효심에 감동하여 노비와 하사품을 주어 할머니를 봉양할 수 있도록 했다는 고사의 내용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러한 까막까치들을 흉조라 하여 사람들이 기피하고 있다. 옛날에도 아침에 까치가 울면 좋은 소식이 전해진다 하여 길조로 여겨왔고 저녁에 까치가 울면 나쁜 소식을 전해준다 하여 흉조로 여겨 서로 상반된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농작물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도시 전신주 꼭대기까지 침입하여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바람에 전기 사고가 자주 일어나 적지 않은 피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인간이 저질러 놓은 잘못된 재앙이 불러온 결과이기도 한다.

농촌 근대화 이후 다수확을 이유로 농작물에 병해충을 뿌린 결과 그들의 먹이사슬인 벌레나 곤충들이 사라져 버린 이유에서이다. 우리나라가 까치를 길조로 여겨 소위 국조로 까지 호칭하게 되었는데 그들을 바라보는 인상이 이러하니 이렇게 된 원인을 누구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가을이면 과수 농가들이 까치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총을 쏘고 그물을 치고 하여 까치잡기에 혈안이 되었다.

지금은 우리들이 옛날에 그렇게 좋아하던 까막까치는 보이지 않고 간사스럽고 흉악무도로 다가서는 까막까치들만이 눈에 보인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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