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지역 스토리텔링이 성공축제 이끈다
[특집] 지역 스토리텔링이 성공축제 이끈다
  • 김영미 기자
  • 승인 2014.10.17 1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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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 이순신 장군 승리의 역사길 따라 명량대첩축제 접목시켜

명량대첩 승리를 기념하고, 해전에서 순절한 진도 출신 참전자들을 기리는 이충무공 벽파전 전첩비이다.

배 13척으로 울돌목에서 왜군 330척 섬멸... 호국유적순례로 그려져

최근 이순신장군을 다룬 명량 영화로 실제 명량해전이 치러졌던 진도 울돌목도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 진도군은 지금 명량대첩 전적지에서 이순신장군의 대첩로를 접목한 스토리텔링으로 명량대첩축제와 연계해 그 당시 벅찬 승리의 환희와 감동을 느끼면서 머물고 마음에 담아가는 시간으로 관광객들을 유입하고 있다. 5천년의 역사를 거슬러 명량해전이 치열하게 치러졌던 진도군에서 이순신장군 대첩로를 따라 그려지는 그 시간으로 다시 되돌아가 본다.

진도군에는 1597년 임진왜란 6년이 서려 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혼란이 극에 달한 조선이 왜군에 의해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누명을 쓰고 파면 당했던 이순신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돼 왜군을 섬멸시킨 명량대첩이 스토리텔링으로 탄생됐다. 진도해협에서 해전이 치열했던 명량해협, 피섬, 벽파항, 벽파 이충무공전첩비, 정유재란 순절묘역, 충무사 전라우수영성지, 명량대첩비 등 호국유적순례가 구례 석주관에서 명량대첩까지로 그려져 있다. 

승리의 역사를 찾아 길을 떠나면 진도 입구에서 가장 먼저 전라우수영성지를 접하게 된다. 우수영성지는 당시 고려시대 진도에는 왜구의 잦은 침략에 87년간 1400여개의 섬을 버리게 된 슬픔을 안고 있다. 이에 주민 등으로 이뤄진 군사들이 대마도 왜구의 본거지를 정벌하러 나섰고 군량미가 떨어져 현지에서 조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때 섬 주민들이 '뿌렁구'를 먹는 걸 보았고 가지고 온 것이 고구마였다.

전적지 스토리텔링에는 고구마 유입 역사도 담겨 있다. 이후 1597년 8월 이순신장군은 병사와 무기를 얻고 군량을 확충해 좁은 장흥 회령포를 벗어나 해남 이진으로 군영을 옮겨갔다. 하지만 과로로 며칠을 심하게 앓게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전선을 거북배로 꾸며 군세를 세우도록 하였다.

26일 함대를 다시 해남 어란포로 옮긴 후 출현한 적선을 쫒아 군사들의 사기를 회복했다.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건너가 왜군을 물리칠 진을 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포구인 해남 우수영에 수영을 설치했다. 이때 좌수영은 여수에 설치하였고 해남을 우수영이라 칭해 지금의 우수영이 되었다.

이곳에서 5분여거리에 위치한 문내면 학동리의 충무사는 이순신장군의 충성심과 구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64년 건립된 사당이다. 명량대첩비와 충무공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전라우수영 내 주둔했던 병장들의 선정과 공적을 담은 불망비 30여기가 충절을 지키고 있다.

충무사에는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충무사는 우수영 돌산에 있었는데 왜군이 관아를 불태우고 충무공의 흔적을 없애려 우수영비를 뜯어가서 깨려했다. 하지만 무서움증이 들어 경복궁 뜰에 우수영비를 묻어 버렸고 해방이후 경복궁을 수리하다 발견돼 비를 옮겨와 보존돼 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세자가 우수영을 오게 됐지만 먹을 것이 없어 밥과 소금물에 절인 나물 두 가지를 대접하게 된다. 이에 수행원이 이 충무공에게 호통을 치자 수군들은 배를 주린데 성찬이라 답해 깨달음을 준 일화도 담겨 있다.

충무사에서 10여분정도 거리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왜군의 선단과 싸워 승전한 명량해전의 격전지로 화원반도와의 사이에 놓인 명량해협을 만나게 된다. 명량해협 조류는 유속이 18노트 시속 40㎞정도로, 수심은 21m에 암반으로 형성돼 있다. 당시 이순신장군에게 남은 건 전의를 상실한 병사와 12척의 배였다.

그때 뛰어난 지략을 지닌 용병 구루지마가 왜군수장으로 나서자 조선은 더욱 술렁였고 330척의 왜군의 배가 쳐들어오면서 역사를 바꾼 전쟁이 시작 되었다. 해전에 이순신장군은 울돌목의 물살을 이용해 판옥선과 배 12척으로 어란포를 출발한 330척의 왜군을 섬멸시켰다.

명량해협 명량의 지명 유래는 물살이 빠르고 소리가 요란하여 바닷목이 우는 것 같다고 하여 울돌목이라 한데서 나왔다. 해협의 피섬은 물살이 센 곳으로 해전때 시체가 떠밀려 와 피로 섬이 물들었다 해서 붙여진 곳이다.

해협 대첩로에 위치한 벽파항과 벽파 이충무공전첩비가 세워진 곳은 진도군을 들어갈 때 사용했던 항구로 삼별초군의 진도 입도 등 수많은 역사를 지닌 곳이다. 당시 어란진에 있던 이순신장군이 많은 왜선이 침입하자 벽파진으로 옮겨 왔다. 벽파항 바위에는 군사가 없어 낮에는 허수아비를 세웠고 매일 밤 진도 어머니들을 데려다가 봉화불을 피워 놓고 밤새 강강술래를 시켰다.

또 벽파항 바위에는 거적을 씌워 수많은 군량미로 위장했고 썰물때는 황토흙을 바닷물에 뿌렸다. 이에 왜군은 강강술래에 많은 군사들이 훈련중이고 바다에 흘려 내려오는 황토물은 수많은 조선군이 밥해 먹는 쌀뜨물이라 생각하게한 기지가 담겨있다.

이순신 장군이 배 13척으로 왜군을 물리 친 명량해협에서 명량대첩축제 행사가 열리고 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아이템을 이곳에서 떠올리게 된다. 부임 당시 생선 3마리를 구워줘 발라 먹었는데 참 맛있었다. 등허리에 창 같이 생긴 가시가 있어 가시로 이를 쑤시려다 거북선에 침을 박아 놓으면 왜군이 오르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는 명량대첩 승리를 기념하고 행전에서 순절한 진도 출신 참전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진도군민이 성금을 모아 벽파항 바위를 쪼아 비신과 비문을 세워 두었다.

진도군은 5천년의 역사속에 국란을 5번이나 겪었다. 임진왜란 7년사 의병사들도 전라도 사람이었다. 해협을 끼고 있는 진도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수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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