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107) 작천면 죽현마을
마을기행(107) 작천면 죽현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3.11.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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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위력을 이기지 못한 나무들은 어느덧 무성했던 옷을 벗어내고 앙상한 가지만을 한껏 드리우고 있다. 갑작스레 찾아온 추위에 가을흔적은 사라지고 들녘은 온통 겨울로 접어드는 모습을 하고 있다. 추수를 끝마치고 휑해진 들녘은 계절의 변화를 더욱 실감나게 한다. 

작천면소재지를 지나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500여m 따라 들어가니 수암산의 동쪽 줄기를 등에 업고 오붓하게 형성된 마을이 죽현마을이다. 죽현마을은 넓은 농경지와 금강천을 바로 앞에 품고 동으로는 금강천을 넘어 평리, 서와 남으로는 수암산을 넘어 성전면과 경계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갈동교를 지나 군자리와 접해 있다.

죽현마을은 예전부터 2개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큰동네를 대고개, 작은동네를 함정골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 뒷등성이를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하여 복호등이라 부르는데 함정골 때문에 호랑이가 내려오지 못한다고 전한다.

마을내에 대나무가 무성하여 죽현이라 이름하였다고 하나 어느때부터 불리었는지 전하는 바가 없지만 죽현이란 이름답게 마을 뒤편으로 아직도 대나무숲이 무성하게 남아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초기 남양홍씨가 마을터를 잡아 죽현이라 칭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이후 광산김씨, 밀양박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현재 죽현마을에는 28호 70여명의 주민들이 미맥농사로 생활하고 있다.

죽현마을에는 면소재지와 마을 사이에 널따랗게 펼쳐져 있는 들판으로 질좋은 모래자갈이 있어 붙여진 지명인 사원이, 마을의 중앙에 있는 바위를 가르키는 생애바위, 마을 뒷산인 왕개산, 수암산에서 내려오는 곳으로 마을에서 바라보면 최정상봉에 해당하는 시리봉, 시리봉과 왕개산 중간에 있는 바위로 거무스름한 색을 띠고 있어 불리우는 검은독바위, 마을앞 동쪽을 가르키며 예전에 깊은 소가 있어 일컬어지는 넓은독골, 마을의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예전에 질그릇을 굽던 자리였던 점등, 마을 앞 들판에 물이 잘 나오는 우물이 있어서 불리어진 명칭인 주나테, 왕개산 넘어 골짜기를 말하는 부슴골 등의 지명이 마을주민들 사이에 정겹게 불리우고 있다.

찾아간 죽현마을의 첫인상은 고즈넉한 모습을 담고 있었다. 마을회관 앞으로 주민들이 주요 경작지로 이용하고 있는 사원이들이 펼쳐져 있고 마을 뒤에는 대나무와 아름드리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마을회관에는 마을주민 서너명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주민들의 모습에서 인생의 관록을 엿볼 수 있었다. 주민 김복임(여·79)씨는 “예전에는 70여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지만 젊은이들이 대도시로 떠나 60세이상의 주민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며 “수십년을 함께 지내다 보니 주민들간에 협동심과 우애가 넘친다”고 마을자랑을 했다. 이어 김씨는 “산수가 좋아 마을에 장수하는 주민들이 많다”며 옆에 앉아있는 곽소순(여·91)씨를 마을에서 최장수 주민이라고 소개했다.

곽씨는 “아직도 달음박질로 동네를 돌라면 뛸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며 “정겹게 살아온 주민들과 마음 편히 사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 아니겠냐”며 밝게 웃었다.

마을회관을 나와 마을이장을 맡고 있는 김권수(48)씨를 찾았다. 논농사와 정원수를 키우고 있는 김씨는 마을의 곳곳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했다. 김씨는 “마을이 개형국이라 개고개로 부르다 대고개가 되고 대고개가 죽현이라 바뀌었다”고 말했다. 또 김씨는 “예전에는 정월 초하룻날 합동세배와 대보름날 농악을 치면서 온 동네를 도는 마당밟기가 성행했지만 주민수 감소로 점차 사라졌다”며 “젊은 주민들이 없어 농촌 후계자를 찾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김씨를 따라 마을을 둘러보다 대고개에서 함정골로 가는 길목에 놓여 있는 지름 1m정도의 연자방아 밑틀을 볼 수 있었다. 김씨의 설명에 따르면 사원이들에 있던 연자방아가 경지정리와 함께 사라지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은 것. 김씨는 아직 땅에 묻혀 있는 연자방아 윗틀을 찾아 주민들의 쉼터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죽현마을과 박산마을 중간에 박산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500여년 전 강진읍 서산리 월곡마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서봉서원이 80여년전에 이곳으로 옮겨 다시 창건되고 액호도 박산서원으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정이 넘쳐나는 곳.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정겹게 수십년의 세월을 살아온 이들이 묵묵히 지켜나가는 그곳. 여기가 바로 언제나 그리워 찾아가고 싶은 고향의 모습은 아닐까.

죽현마을 출신으로는 육군대령으로 예편한 김상수씨, 광주에서 경위로 퇴직한 박정현씨, 화순 군청 사회복지과에 몸담고 있는 서병선씨, 육군대령으로 예편하였으며 금호그룹에서 퇴직한 윤순오씨, 화순 농협에 근무하는 서영성씨 등이 이마을 출신이다.

 

인터뷰-윤영남씨

올해 처음 수확한 생강을 저장하기 위해 흙에 묻고 있던 윤영남(67)씨를 만났다.

대전에서 40여년을 생활하다 남편 조길육(68)씨의 고향인 죽현마을로 4년전에 내려와 정착한 윤씨는 “자식들 모두 키워 시집, 장가 보내고 남편이 고향으로 내려가 사는게 어떻겠냐고 권해 죽현마을로 내려왔다”며 “마을주민들 간에 우애가 넘치고 마을 대소사에 너나 할것없이 나서 사람사는 정이 있는 마을”이라고 소개했다.

윤씨는 “남편과 함께 식량 정도 할 요량으로 3마지기 농사를 짓고 있다”며 “농삿일이 익숙치 않고 날씨가 좋지 않아 올해는 40㎏ 20가마 정도를 수확했다”고 말했다. 이어 윤씨는 “명절때 자식들이 내려오면 한두가마씩 식량으로 보내줄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른 농사에 대해 윤씨는 “텃밭에 올해 처음 생강과 고추를 조금씩 심어 봤다”며 “올해 비가 많이 와서 고추농사는 많은 피해를 입었고 생강도 만족할 만한 양은 아니지만 양념 정도 할 요량”이라고 답했다.

양쪽 무릎이 불편해 병원을 자주 찾는다는 윤씨는 “몸이 아프다 보니 병원을 가는 일이 가장 큰 불편”이라며 “마을에 군내버스가 들어오지 않아 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이용해 면소재지에 있는 병원을 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윤씨는 “마을주민 대다수가 60세 이상이라 면소재지 한번 나가는데도 어려움이 많다”며 “주민들의 불편 해소를 위해 마을 안까지 버스가 들어왔으면 하는 바램”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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