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으로 먹고 살며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
'협동'으로 먹고 살며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4.06.28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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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 - 성전면 처인마을]

관내 최초 협동조합설립...'처인청년회가'로 똘똘 뭉쳐

찌는 듯 하는 무더위는 봄을 지나 여름이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다. 들녘에 초록물결을 이룬 어린모들은 여린 몸으로 한낮의 햇볕을 이겨내며 풍년을 향한 첫걸음을 시작하고, 이를 바라보는 농민의 모습에서는 왠지 모를 간절함이 더욱 묻어나는 듯하다.
 
한 뼘의 시원한 그늘을 찾아 잠시 발길을 향한 곳은 성전면 처인마을. 성전면소재지에서 해남방면으로 1㎞를 달리다보면 좌측방면으로 마을 입구를 알리는 입석이 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입구를 지나 나지막한 언덕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널따란 공터를 배경으로 솟아있는 해송 한그루가 제법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해송은 조선시대 숙종 40년대 식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지난 2000년도에 군 보호수로 지정되면서 오늘날 마을의 자랑거리로 전해지고 있다.

마을회관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성전면 월평리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우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민들에 따르면 '관야정'으로 불리는 이곳은 지난 1970년대까지 마을주민들이 자주 모여 앉아 글공부를 해왔던 곳이다.
 
주민들은 예부터 교육열이 높아 서당이나 야학 등을 개설해 글공부 등 학문을 꾸준히 이어왔고 특히 지난 1933년도 시기에는 마을회관에서 한글·산수 등을 배울 수 있는 교육환경이 조성됐다.

해방 이후에는 몇몇 사랑방에서 서당을 열고 마을 청년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쳤는데 마을청년 대다수가 학문에 전념했을 정도였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강진군마을사를 살펴보면 주민들 가운데서는 특히 조성후, 강대인, 박쌍식씨 등이 학식이 뛰어났으며 회관건립, 야학운영, 청년회조직, 주민계몽 등으로 마을을 부자로 만드는데 공헌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본래 처인마을은 지난 1920년대까지 친둥마을로 불리었다. 하지만 지난 1938년도에 이르러 어진 인재가 배출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처인'으로 개칭돼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으로 평강 채씨인 채충현이 전국을 유람하다 이 일대 경관이 좋다고 평하면서 '300년은 안주할 것으로 여기고 터를 잡았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김해 김씨, 경주 이씨, 전주 이씨 등이 이거해 오면서 오늘날 20여 가구, 4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주민 대다수는 벼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는 가운데 몇몇 농가는 오이와 여주재배 등 복합영농에도 힘쓰고 있다.
 
본래 처인마을은 농사를 지을만한 토지가 그다지 넓게 형성되지 않으면서 주민들은 밭농사 혹은 하우스재배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이중에서도 오이재배로 유명세를 떨쳤는데 한 때는 마을에서 수확되는 오이가 한 해 평균 100여톤에 이르렀을 정도로 성전면내에서는 비교적 큰 규모의 재배단지를 나타냈다.
 
오늘날에는 오이이외에도 여주작목에 힘을 쏟으면서 새로운 소득창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여주는 비타민 C, 칼륨, 인 등 미네랄이 풍부하여 웰빙 건강채소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당뇨병 개선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발표되면서 '자연산슈퍼인슐린'이라 불리고 있다. 

여주는 대게 25㎝정도 크기로 수확돼 오는 7월까지 판매하고 최근에는 농협마트로 판매가 확대되면서 전국적으로 판매망을 넓히고 있어 효자작목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처인마을은 새마을운동을 계기로 주민들의 단합과 합동을 중요시 여겨왔다. 이는 지난 1945년도에 크게 빛을 바라는데, 바로 관내 최초의 협동조합설립이었다.
 
당시 주민들은 벼 한 섬 이내에서 능력에 따라 출자금을 마련해 조합을 운영했다. 조합의 형태는 현재 성전성당이 위치해 있는 근방부터 마을 입구까지 이르는 부근까지 정미소, 구판장, 이발소, 목욕탕 등을 운영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민들은 조합을 운영하면서 얻은 수익금을 출자한 비율에 따라 나눠 가졌고 이익금 중 일부는 대학에 진학한 마을 출신 학생을 위해 장학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만큼 어진 인재가 배출되기를 바라는 주민들의 바람은 협동조합운영에서도 깊게 배어났을 정도였다.

그러나 협동조합은 지난 1970년도에 이르러 조금씩 힘을 잃게 됐고 마을단위 조합이 읍·면 단위로 합병되면서 차츰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조합의 형태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합동과 단합을 중요시 여겼던 주민들의 생활상은 '處仁靑年會歌(처인청년회가)'에서도 쉽게 엿볼 수 있다. 處仁靑年會歌(처인청년회가)란 마을에서 전해져 오는 노래, 즉 동가로 1절부터 4절까지로 이뤄져있다. 

동가를 작사·작곡한 조성후(작고)씨와 주민들은 노래가사에 마을의 풍광과 주민들의 모습을 담아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즐겨 부르도록 하며 마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잇고자 했는데 이 또한 노래를 바탕으로 주민들의 단결과 협동심을 높이기 위한 매개체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

성전면에서 가장 먼저 경로회가 발족되었다는 마을이야기도 분명 주민들의 결집력과 경로효친사상을 우선시했기에 이뤄진 결과로 비춰지고 있다.  

◈ 인터뷰 - 처인마을 김 웅 이장

"예부터 협동심이 가장 큰 자랑거리"
올해로 3년 째 마을이장을 맡고 있는 김 웅(51)이장은 마을소개에 대해 "예부터 협동심이 강했던 마을"이라며 주민들의 단합과 화합을 가장 큰 자랑거리로 강조했다.
 
처인마을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정월대보름날 주민 모두가 모여 당산제를 올리고 있으며 6월 유두날에는 마을에 경로잔치를 벌여 화합과 단합을 도모하고 있다.
 
김 이장은 "유두날 잔치에는 인근 주민들까지 초대해 함께 즐기는 경우도 많다"며 "잔칫상을 워낙 크게 준비하고 마련하다보니 가끔 요란법석 할 때도 있는데 이마저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근 주민들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하지만 젊은층은 줄어들고 노년층만 늘어나는 여느 농촌사회에서 잠시나마 재미와 웃음이 울려 퍼질 수 있다는데 위안을 삼아야하는 농촌의 현실은 이내 씁쓸함으로 남기는 마찬가지였다.
 
김 이장은 "처인마을도 인구감소와 인력부족 등 여느 농촌사회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위기를 안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며 "무엇보다 젊은층 감소는 마을 소득창출은 물론 발전에도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끝으로 김 이장은 "농촌에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화합과 단합이다"며 "농촌사회에 하루 빨리 새 희망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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